[동네의 재발견] 아날로그 레코드의 부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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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의 재발견] 아날로그 레코드의 부활(상)

    LP는 음악에 대한 소유와 경험
    디지털 키즈 MZ세대, 아날로그에 빠져
    레코드 문화 중심에 '동네 가게' 역할 중요
    40년 된 '명곡사', 춘천 레코드 문화의 성지

    • 입력 2021.05.31 00:01
    • 수정 2023.09.07 12:41
    • 기자명 권소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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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볍게 먼지를 털어내고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올린다. 바늘을 떨어뜨리고 잠시 기다리면 빙글빙글 도는 레코드의 소리골을 따라 음악이 흘러나온다. 바이닐에 흠집이 있거나 톤암의 침압이라도 맞지 않으면 ‘지지직’ 하는 소리가 귀를 괴롭힌다. 레코드 한쪽 면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은 30분 남짓. 재생이 끝나면 판을 뒤집어 반대쪽 면에 다시 바늘을 내려놓는다.

    판이 다 돌아간 뒤엔 먼지가 붙지 않게 잘 정리하고, 정전기가 생기지 않도록 전용 속비닐에 감싸 재킷 안에 넣어 둔다. 재킷이 상하지 않도록 다시 깨끗한 겉비닐에 넣어두면 끝. 오리지널 레코드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턴테이블과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수십, 수백 장의 레코드를 보관하고, 앰프와 스피커를 놓을 공간도 필요하다. 일련의 과정은 한없이 번거롭지만, 사뭇 경건하고 낭만적이다.

     

    턴테이블과 LP. (사진=셔터스톡)
    턴테이블과 LP. (사진=셔터스톡)

    ■‘요즘 것들’의 음악 취향

    MZ세대는 지구상의 그 어떤 인류보다도 음악을 쉽게 소비했던 세대다. 소액의 월 구독료만 내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고, 유튜브에도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 선곡한 플레이리스트가 넘친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디지털 음원은 너무 편리해서, 때로는 건조하다. 바로 이 지점이 ‘요즘 것들’이 오래된 아날로그에 빠진 이유다.

    ‘LP(Long-Playing Record)’로 통칭되는 아날로그 레코드는 1990년대 초반 이후 CD에 자리를 빼앗기며 급속도로 위축됐다. 이를 경험해본 적 없는 대부분의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에게 아날로그 레코드는 새로운 놀잇감이다. 접해보지 못한 대상에 대해 ‘쿨’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체험에 대한 성취감, 레트로한 매력이 있는 레코드 재킷은 SNS 상 ‘있어보이즘’에 대한 만족감까지 채워준다.

     

    아날로그 레코드의 부활로 집집마다 책장 구석에 쌓여있던 중고 LP들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사진=권소담 기자)
    아날로그 레코드의 부활로 집집마다 책장 구석에 쌓여있던 중고 LP들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사진=권소담 기자)

    도서음반 판매업체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LP 판매량은 전년 대비 73.1% 증가했다. 특히 가요 부문 판매량은 같은 기간 262.4% 늘어나며 수요가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이처럼 온라인 대형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듯 비대면으로 LP판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날로그 레코드의 ‘감성’은 오프라인 매장을 찾아가 정성 들여 음반을 구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중고 음반을 다루는 빈티지숍에서 디깅(Digging)을 통해 재킷 사진과 바이닐의 상태, 트랙 리스트를 따져 고르거나, 단골 레코드점의 사장님이 추천해주는 음반을 구입한다. 아날로그 레코드의 흥행에는 ‘동네’의 역할이 필연적이다. 아날로그에 빠진 ‘디지털 키즈’가 골목상권의 문화적 풍요를 가져온 것이다.

    ■춘천 레코드 문화의 성지

    춘천에도 MZ세대를 아날로그 레코드의 매력으로 인도하는 재미난 가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레코드 문화의 구심점을 꼽자면 바로 명동의 터줏대감, 명곡사(대표 이석범)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다수의 춘천시민들이 연령대를 불문하고 “내 음악 취향은 명곡사에서 시작됐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J.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법 지팡이 가게 ‘올리밴더스’를 떠올리게 하는 명곡사는 각종 CD와 LP, 카세트테이프로 가득하다. “재즈 앨범을 찾아달라”는 손님의 요구에, 촘촘히 쌓여있는 제품들 사이에서 손님의 취향에 맞을 법한 음반 몇 장을 골라 소개한다. 1981년 개업해 업력 40년을 맞은 만큼, 이상범 대표의 음악에 대한 애정과 스토리텔링이 공간의 매력과 맞물려 빛을 발한다.

     

    춘천 레코드 전문점 '명곡사'의 내부. (사진=권소담 기자)
    춘천 레코드 전문점 '명곡사'의 내부. (사진=권소담 기자)

    최근 명곡사를 찾는 손님들도 다양해졌다. 기존에는 중장년층 단골이나 아이돌 그룹 앨범을 사러 오는 중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다면, 2~3년 전부터는 LP를 사려는 20~30대 고객들이 늘었다. 어려운 음반 시장 속에서, 아직은 LP보다 CD에 대한 수요가 크지만 LP판을 구입하는 손님들은 기존 명곡사의 손님들과는 분명 다른 범주에 있는 소비자들이다. 이석범 대표의 통큰 에누리에 충성 고객들도 많다.

    이석범 대표는 “요즘 젊은 세대 중에는 ‘음악을 소유하는’ 경험을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은데, LP를 구입하면서 소유에 대한 만족감이 생기는 것 같다”며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소통하면서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관심의 외연을 확장해가는 경험을 제공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화와 예술이 숨쉬는 도시, 춘천의 음악 지킴이로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며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면서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40년 업력의 춘천 레코드 전문점 '명곡사'. (사진=권소담 기자)
    40년 업력의 춘천 레코드 전문점 '명곡사'. (사진=권소담 기자)

    도미니크 바트만스키와 이언 우드워드는 ‘LP :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레코드판’에서 “디지털 혁명이 거의 완성된 듯한 바로 그 시점에 LP는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르네상스를 맞이했다”고 언급했다.

    아날로그 레코드처럼 ‘사람의 경험’에 대한 만족감을 선사하는 물리적 매개체는 ‘비대면’과 ‘메타버스(Metaverse)’를 논하는 시대에도, 오프라인 골목상권 시장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다.

    [권소담 기자 ksodamk@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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