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한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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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한자 이야기

    • 입력 2021.03.28 00:00
    • 수정 2021.03.29 06:43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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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우리나라 작가 두 사람의 소설집을 읽고 좀 놀랐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놀랐다. 내가 놀랐던 것은 ‘영어’와 관련이 있다. 우선, 두 작가 중 한 사람은 동음이의어를 구별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한자어 대신 영어를 병기했다. 예를 들면, 눈을 ‘눈[雪]’이라 적지 않고 ‘눈[snow]’이라고 하는 식이었다. 다른 한 작가는 소설의 내용 가운데 거의 반 정도나 차지할 만큼 상당히 많은 분량을 영어로만 써놓았다. 따로 우리말로 옮기지 않아서 작품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 스스로 영어로 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길 수밖에 없고, 당연히 우리말로 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릴 작품이다. 가독력도 문제지만, 우리말로 옮기는 수고까지 해가며 읽을 독자가 많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쓴 작가의 뚝심이 경이로웠다. 

    번역일을 하면서 영미 작가들의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다보면 다양한 유럽어들이 작품 속에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봐왔다.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은 따로 주석이 달려 있지 않다. 그래서 일일이 해당 언어의 사전을 찾아 영어로 옮긴 뒤 역자 주석을 달거나 그 언어의 전공자들을 찾아 번역을 부탁하곤 하는데, 출판사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내 지갑에서 나가게 된다. 유럽 지역을 안방 드나들 듯했던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작품 안에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을 그대로 사용한 대표적인 작가다. 사실 영미권 작가의 작품들 대부분이 헤밍웨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럴 때면 매번 궁금했다. 작가 자신들에게는 ‘이해 가능한 외국어’일지 모르나 그들 나라의 독자들에게까지 ‘이해 가능한 외국어’일까? 놀라야 할 일인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인지, 헷갈린다.

    앞서 언급한 우리나라 작가 두 사람의 작품집에는 한자(漢字)가 단 한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 현상으로부터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하나는, 두 작가에게 한자는 우리말과의 오랜 역사적 관련성과 상관없이 영어보다 독해 가능성이 낮은 외국어라는 사실이다. 이는 작가 자신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적용되는데, 작가는 가령 ‘밤’을 ‘夜’라고 하는 것보다 ‘night’이라고 하는 것이 더 유효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리 있는 생각이긴 하다. 실제로 ‘雪/夜’와 ‘snow/night’를 제시하고 아는 글자를 고르라고 하면, 30~40대는 몰라도 20대의 경우는 ‘snow/night’가 압도적일 것이다. 두 작가의 작품에 한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현상에서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은, 한자에 대한 거부감이다. 이는 어쩌면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고, 한자를 거의 우리말처럼 여기는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다. 곧바로 환원하는 건 문제가 있겠으나, 이는 상대적으로 미국에 대한 친밀감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한자가 병기된 교과서로 공부한 내게 이런 현상은 흥미와 함께 우려를 자아낸다. 어차피 한자는 점점 더 ‘모르는’ 외국어가 되어 갈 것이고, 굳이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도 문장을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한글전용을 해야 한다거나 국한문혼용이 옳다는 주장들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시대도 이미 지났다. 영어에 친숙한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헷갈리는 글자를 구별하는 데 영어가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자를 해득하지 못하는 현상의 일반화가 더욱 심해져서 “한자로 된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학자들까지 희귀해지다가 마침내 전무해졌을 때”이다. 짧게는 50~60년 전, 적어도 100여년 이전의 서적과 문서들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한자를 해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결국 ‘우리’의 ‘유산’들이 더 이상 ‘우리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내신 박민일 선생이 작고하시기 전인 2013년에 김유정문학촌에 기증한 200여종 500여 점의 소중한 육필원고, 친필편지와 엽서, 사진자료 들을 지난 한 달여에 걸쳐 꼼꼼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내 가슴을 가장 설레게 했던 자료 중의 하나가 탄허스님의 편지였다. 율곡학회 이사장을 지내고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한 고전문학자 최승순 선생이 강릉에 계실 때 보낸 안부의 편지로, 탄허스님 특유의 유려한 초서가 가득한 국한문혼용체다. 춘천학연구소 소장(허준구)과 학예연구사(김근태)의 도움을 받아 알아보기 쉬운 한자와 우리말로 옮겨놓았을 때,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긴 했지만 다시 갑갑해져왔다. 머지않아 이런 편지들은 ‘해득할 수 없는’ 유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내용을 알아낼 수 없는 편지는 옛 가마터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보다 나을 게 없을 것이고, 그야말로 “검은 건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는 식의 어줍은 농담에 묻혀버릴 것이다. ‘언어는 생물’이라는 말에 빗대자면, 한자는 멸종위기에 빠진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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