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기 연예쉼터] ‘그것이 알고싶다’, 정인이 사건이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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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병기 연예쉼터] ‘그것이 알고싶다’, 정인이 사건이 남긴 숙제

    • 입력 2021.01.13 09:18
    • 수정 2021.01.13 14:51
    • 기자명 헤럴드경제 대중문화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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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병기 헤럴드경제 대중문화 선임기자
    서병기 헤럴드경제 대중문화 선임기자

    나는 콘텐츠 산업과 미디어 산업 현장 취재를 20년 넘게 하며 기사를 써오고 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던 지상파의 위력이 갈수록 줄고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지상파 PD들이 연예인을 섭외하는 일도 점점 만만치 않다고 고충을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상파가 최근 힘을 제대로 발휘한 적이 있다. 한번은 지난해 9월 30일 저녁 KBS를 통해 방송돼 코로나19로 인해 위축돼 있던 대한민국 사람들을 뜨거운 감동으로 물들였던 KBS2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였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서울 시청률은 무려 30.3%를 기록했다. 지상파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 스스로도 놀랐을 것이다. 

    ‘테스 형’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나훈아의 공연을 방송한 KBS는 지상파의 위기에서 모처럼 ‘위너’가 됐다. 유튜브와 OTT의 공격속에 위축되고 있는 지상파의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한 수 가르쳐줬다. 

    또 한번은 지상파가 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은 지난 2일 방송된 SBS 탐사보도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정인이는 왜 죽었나’편이었다. 

    생후 7개월때 양부모에게 입양됐다가 9개월만에 하늘로 떠난 정인이가 어떻게 학대를 받아 죽게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정인이 사건을 제대로 공론화해 전국민적 분노를 유발시켰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정인이는 왜 죽었나’ 편은 사실 끝까지 보는 게 힘들 정도였다. 텍스트가 아닌 영상을 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온 몸이 골절이고 멍 투성이인 아이를 보는 참담함과 그 아이에게 학대를 저지른 양부모에 대한 분노, 거기에 왜 어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과 무력감이 함께 몰려왔다.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고통속에 이 세상을 떠났을 어린 정인이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일본드라마가 원작인 tvN 드라마 ‘마더’에서 친모와 내연남에게 학대를 받아 추운 겨울 검은 비닐 봉지에 싸여 버려진 8살 여자 아이를 보는 것으로도 억장이 무너졌는데 이번 사건은 실제 이야기여서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인이의 상태를 본 전문의들은 “배가 피로 가득 차 있었고 췌장이 절단돼 있었다. 단순사고로 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정인이의 양쪽 팔과 쇄골, 다리 등에 골절이 있었고 이 골절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저렇게 아이를 학대하려면 왜 입양을 했을까? 차라리 (아이를 키울 능력이 안되면) 파양을 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아동학대 가해자들에겐 공통점이 없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아동학대의 원인과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정인이의 몸에 난 많은 멍에 대해 입양 당시 몽고반점이 유난히 많았다고 해명하는 양부를 보면서 분노는 배가됐다. 정인이의 죽음이 ‘고의’가 아니라 ‘실수’라는 게 양모인 장 씨의 주장이었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그동안 정인이를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갔다는 점이다. 세 차례의 아동학대 신고가 있었지만 실제적인 조치와 상황에 맞는 대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인이가 온 몸에 멍이 든 걸 알아차리거나 차에 오랜 시간 방치된 것을 목격하거나 영양실조 상태를 직접 진단한 이들이 용기를 내 경찰에 신고했지만 정인이를 구하지 못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양천경찰서는 양부모의 아동학대 정황이 없다고 판단하고 내사종결했다. 한 번도 정식수사가 이뤄지거나 정인이의 양부모로부터 분리되는 일도 없었다. 아이는 매번 장 씨 부부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정인이 사건 담당자는 3차례나 바뀐 것으로 ‘그것이 알고싶다’는 보도했다.

    이건 우리에게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차라리 몰라서 그런 결과가 초래됐다면 화가 덜난다. 하지만 정인이를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놓친 것은 공권력 등 사회안전망의 허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그냥 넘기는 것은 국민들의 직무유기다. 전 국민이 방관자가 되는 거다. 이에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가 SNS를 통해 확산되며 정인이를 추모한다. 배우 이영애가 쌍둥이 자녀들과 함께 정인이가 묻힌 경기도 양평의 공원묘지를 찾는 등 추모객들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정인아 미안해’ 실검 챌린지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과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가 제안했다. 가해자에 대해 아동학대죄가 아닌 살인죄로 처벌하게 하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안이한 수사와 부실한 입양절차 방지를 위해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겠지만 아동학대를 방조한 어른들의 잘못된 대처는 철저하게 따져 재발을 막아야 한다. 뒤늦게라도 추악한 아동학대를 막기 위해서는 13일 시작된 정인이 양부모 재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며 전 국민이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정인이 사건은 해법없이 분노와 흥분만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다. 장애인권법센터 대표이자 센터에서 장애인·여성·아동 공익 사건을 전담하는 김예원 변호사는 지난 6일 한 인터뷰에서 “정인이 같은 사건은 한 달에 한 번씩 계속 일어납니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서 짜야 해요. 가해자의 형량을 높이는 건 아무 답이 안 됩니다. 법정형 하한선만 높이면 결과적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갑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아동학대 문제에 대해 좀 더 식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지상파는 힘이 떨어지고 있지만 잘만 쓰면 전국민적 관심을 유도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다. 아동학대 실태와 방지에 대한 자세하고 지속적인 보도가 지상파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말미에 김상중이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늦게 알아서 정인아 미안해”라고 말한 것이 시청자에게 긴 여운을 남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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