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가난한 마음의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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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가난한 마음의 풍요

    • 입력 2021.01.03 00:00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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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새해다. 나이에 따라 새해를 맞는 마음이 달랐는데, 다르다고 해봐야 희망이니 기대니 바람이니 하는 것에 붙박여 있었다. 이게 좀 확연히 바뀐 건 50대로 접어들면서였다. 희망과 기대와 바람이란 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걸 그 나이 때쯤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맘때의 어느 글에 나는 “로또를 열심히 사는[買] 것을 열심히 사는[生]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식의 회한을 남겼었다. 더 이상 그런 식의 회한도 남기지 않는 나이가 되고 보니 해가 바뀌는 건 그저 깨끗한 탁상달력을 책상 한 켠에 놓아두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희망, 기대, 바람이 완전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런 게 전혀 의식되지 않는 ‘거짓말 같은 일’이 이따금은 일어나는 게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210년 전, 그러니까 1811년 조선의 대학자 정약용은 땅끝마을로 유배를 떠난 지 십 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쯤 되자 그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거의 접었는데 그의 그런 마음이 흑산도로 유배가 있던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그는 유배지의 초당이 있던 다산(茶山)을 하늘이 자신의 별장으로 삼아주고 또한 차밭이 있던 보암(寶巖)의 밭 몇 뙤기를 입에 풀칠할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아주니 고마운 일이라 하고는 한 해가 다 가도록 아이 울음도 여인들의 탄식도 들려오지 않는다고 쓴다. 이것을 그는 후한 복과 높은 지위라 하고는 이런 좋은 곳을 놓아두고 어찌 지옥을 바라겠는가 하고 맺는다. 그의 이런 인식을 강조하듯 편지의 마지막에 그는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이 정말로 이렇습니다”하고 단단히 못을 박는다. 진정한 체념이야말로 진짜 희망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사전을 찾으면 체념과 희망은 서로 반대말이지만 체념은 도저한 희망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 갇힌 채 꿈꾸기를 강요하는 희망은 그 자체로 헛된 망상이다. 망상으로서의 희망을 버렸을 때 가장 절실히 찾아드는 게 체념이라면 이때의 체념은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단념”함으로써 “비로소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 생겨난 것을 가리킨다. 헛된 희망은 깨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정약용이 3천 날이 넘는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 그곳의 소외된 학도들을 가르치고 세상의 명인들이 그를 찾아와 진리를 논한 것은, 권력의 그늘에 있었다면 전혀 없었을 일일 수도 있다. 다산이 흑산도의 형에게 편지를 쓰기 한 해 전, 음력이겠지만 새해를 맞이해 감회를 쓴 ‘원일서회(元日書懷)’란 시가 있다.

    養疾山阿側(양질산아측) 蕭然一草堂(소연일초당)
    藥爐留宿火(약로유숙화) 書帙補新裝(서질보신장)
    愛雪愁仍渙(애설수잉환) 憐松悶不長(연송민부장)
    玆丘可終老(자구가종로) 何必丐還鄕(하필개환향)

    산기슭 한쪽 병든 몸 건사하는 고요한 초당 한 칸
    약 화로에 묵은 불씨 남기고 서책은 새로 묶네
    눈 좋아 쉬 녹을까 걱정하고 솔 자라지 않아 근심하며
    이 언덕에서 늙을 만하니 돌아가 구걸할 일 뭐 있나

    ‘마음의 가난함’은 삶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는 근원이다. 평생 온갖 종류의 욕망들로 바글바글 들끓는 마음을 ‘아비지옥’에 비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산기슭의 초가집 한 칸에 살며 불씨 남겨놓은 약 달이는 화로와 읽고 읽어 해진 책을 새로 묶는 마음의 가난은, 욕망의 불길 솟구치는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 희망과 기대와 바람 대신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물어보아야 할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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