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가장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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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의 뒤적뒤적] 가장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 입력 2020.11.30 00:00
    • 수정 2020.12.08 10:29
    • 기자명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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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깨달음은 깊은 산속 사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마음도 크고 멋진 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처와 성자는 시장에서 또는 우리가 땀 흘리는 일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학자도, 예술가도, 높은 벼슬아치도 아닌 사람이 하는 말이 큰 울림을 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어려운 사상도 아니고, 아름다운 말도 아니고, 큰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생각,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통사람의 말로 담담하게 털어놓은 편이 가깝게 다가옵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사랑 많은 사람이 슬픔도 많아서』(정용철 글·사진, 좋은 생각)가 바로 그런 글을 모은 책입니다. 지은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잡지 『좋은 생각』을 오랫동안 발행해온 출판인입니다. 무려 40년 넘게 책 만드는 일을 해온 그가 이번엔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대단한 이치가 담기지는 않았습니다. 은퇴한 지은이가 접한 일상에서 길어낸 짧은 이야기들에 뭐 그리 깊은 사상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밑줄 그을 만큼 멋진 문장이 수두룩한 것도 아닙니다. 책의 제목이 서정적이어서 감상적인 에세이집 같지만 그렇습니다. 시인, 작가의 글이 아니니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꾸 눈이 갑니다. 평범하기에, 꾸미지 않았기에 아니 그래서 더욱 친근하고 거듭 곱씹어볼 만합니다.

    지은이의 머리 스타일을 두고 그의 아내와 미용사가 벌이는 신경전(?)을 소재로 한 ‘미용사와 아내’란 글을 볼까요. 아내는 지은이더러 앞머리를 짧게 자르라고 합니다. 반면 미용사는 앞머리를 길게 두라고 합니다. 지은이가 아내 말을 따르자 미용사는 “길면 더 예쁠 텐데…”라며 아쉬워합니다. 아내 말을 따른 지은이는 두 사람이 만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미용사는 이발을 마친 지금의 머리를 보고 아내는 지금부터 이발할 때까지의 전부를 본다”는 거죠.

    여기서 그치면 그저 흔한 일상일 텐데 지은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동안 붙잡고 있던 여러 가지 기준이 무너진다. 예전에는 어느 쪽, 무엇만이 정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한쪽만의 절대는 없다. 어떤 것, 그 생각을 누구는 좋아하지만 누구는 싫어할 수도 있다…세상에 꼭 따져야 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일은 회색지대에 두 발로 선다. 그곳에 기쁨과 사랑이 있다면 바로 믿겠는가?” 글은 이렇게 끝납니다. 가히 일상의 철학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요? 요즘 세태에 비춰 새겨볼 만한 말 아닌가요?

    ‘모른다’란 글에선 깊은 깨달음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왜 ‘모른다’는 말을 편하게 하지 않을까, ‘모름’을 왜 부끄러워할까란 의문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한때는 자신이 많이 아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뒤에 멀리 떨어져 혼자 걷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실로 쉽지 않은 공개 고백으로 보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희망은 ‘모른다’는 말에서 출발한다.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알게 된다. 모른다는 사람만이 질문의 삶을 살 수 있고, 그들이야말로 언젠가 대답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마무리합니다. 이를 보다가 어디선가 읽은 학문(學問)의 본뜻에 대한 설명이 떠올랐습니다. 학(學)은 본인 스스로 익히는 것이고, 문(問)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 배우는 것이랍니다. 이처럼 학문이란 본디 모르는 것을 물어 배우는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뜻이겠지요.

    다시 이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름난 학자나 종교인만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담담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하는 일상의 철학이 지닌 가치를 일러주는 책입니다. 아마 이게 에세이의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릅니다.

    책 속 한 구절

    -“이파리는 많아도, 뿌리는 하나/ 거짓으로 보낸 젊은 시절 동안/ 햇빛 아래서 잎과 꽃들을 흔들어댔지/ 이제 나는 진실을 향해 시들어 가네”(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아직 당신은 차갑게 식지 않았습니다/ 또한 생명이 자신의 비밀을 풀어놓기 위하여/ 깊어 가는 당신의 바닥으로 잠기기에도/ 아직 때는 늦지 않았습니다”(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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