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경산 코발트광산, 추모와 평화의 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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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경산 코발트광산, 추모와 평화의 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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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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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전후해 청년들이 자주 드나드는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경산시 평산동에 있는 한 폐광산을 두고 갖가지 기괴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곳에 귀신이 출몰한다거나 갔다 오는 길에 꼭 사고가 난다거나 하는 흉흉한 이야기들이었다. 이후 이 같은 일련의 이야기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경험담들이 으레 그렇듯) 살이 붙여지고 부풀려져 각종 괴담과 도시전설의 형태로 유포됐다. 급기야 공포 체험을 한답시고 해당 장소에서 ‘인증샷’과 경험담을 유튜브나 커뮤니티에 올리는 청년들도 있었다. 이윽고 전국에서 공포나 오컬트 등에 심취한 이들이 무단으로 광산에 출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태로 인해 눈물을 삼킨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 전쟁기 때 가족을 잃은 경산 대구 지역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다.

 

임시적으로 발굴 유해가 안치되었던 콘테이너. (사진=김용엽 객원기자)
임시적으로 발굴 유해가 안치되었던 콘테이너. (사진=김용엽 객원기자)

사실 이곳은 한국전쟁 개전기에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및 군, 경이 조선인민군에 대한 잠재적 부역자 및 좌익사범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후 암매장한 공간인 ‘경산 코발트광산’이다.

이 폐광산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제는 전시체제 하에 전쟁에 쓰일 전쟁물자를 공출하기 위해 한반도의 지하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했다. 경산 코발트광산도 일제의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일제가 패망한 후 경산 코발트광산은 한동안 폐광산으로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이승만 정부)는 일제의 잔재인 이 공간을 다시금 이용한다. 하지만 그 용도는 국부를 새로이 창출하기 위한 것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무차별 살육을 통한 공포 통치를 위한 용도였다. 어떤 사람들이 선별돼 희생됐을까?

당시 대구형무소에서는 1946년 10월 친일 관료들과 미군정의 부패와 무능에 반발해 일어난 대규모 대중 시위(그동안 ‘10월 폭동’ 등으로 매도된 끝에 국가의 공식적 명칭은 ‘대구 10.1 사건’이나 시민사회와 유족회는 봉기의 자발적이고 민중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해 ‘10월 항쟁’으로 칭해왔다.) 참여자 및 연루자들이 한국전쟁 개전기까지 수감돼 있었다.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제1공화국 정부와 군경은 이 대구형무소 재소자들과 민간인들이 대다수인 보도연맹원 수천명을 이곳 경산코발트광산에서 즉결 학살 후 암매장했다. 최소 1800명에서 3500여명에 이르는 민간인들 및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기자는 답사 후 나정태 경산 코발트광산 유족회장과 짧은 통화를 나눴다. 나정태 회장의 부친 역시 1946년 10월 대구의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희생됐다. 나 회장에 따르면 발굴과 수습 끝에 발견된 충북대학교 안치소(이후 세종시 추모의집으로 이전)에 모셔진 2100구의 유해 중 600구 가량이 경산 코발트광산 및 인근 대원골 희생자들인데 이는 전체 지역별 희생자들 중 가장 많은 수치다.
 
목격자들 및 생존자들의 증언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의 조사에 따라 윤곽이 잡힌 살해 방법도 무척이나 잔혹했다. 우선 사람들을 몇 명 단위로 철사나 밧줄로 묶은 다음 갱도 앞에 일렬로 세운다. 그런 다음 맨 앞에 있는 사람을 쏘면 묶여 있는 사람 모두가 무게 중심을 잃고 수십 미터 깊이의 갱도로 떨어진다. 그리고 나서 갱도 밑으로 무차별 총격을 통해 ‘확인사살’을 하거나 불을 지른다. 그러한 방식으로 아동과 노인, 여성을 포함해 수천명가량이 아비규환 속에서 죽어갔다.

이 학살의 현장은 제1공화국 시대는 물론이고 군사정권 통치기 동안 금기의 영역으로써 은폐됐다. 희생자 유족들은 사회로부터 ‘빨갱이’ 내지 ‘부역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다가 2005년 진실화해위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에 착수했으나 2010년 뜻하지 않게 진실화해위 활동이 종료되고 방치되면서 ‘심령스폿’ 내지는 ‘담력시험장’ 등의 왜곡된 형태로 소비된 것이다.

 

왼쪽부터 희생자들이 학살당한 후 매장된 공간, 2016년 세워진 위령비. (사진=김용엽 객원기자)
왼쪽부터 희생자들이 학살당한 후 매장된 공간, 2016년 세워진 위령비. (사진=김용엽 객원기자)

결국 유족회와 평화운동가들의 오랜 노력 끝에 2016년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경산 코발트광산의 실상을 알리는 팻말이 세워졌다. 다행히 현재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보호되고 있으며 유족회 및 시민사회에서는 평화공원 설립을 위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 2010년을 전후로 공포 체험이나 담력 시험을 하겠다고 이 장소를 방문한 (기자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철부지 청년들이 보고 느꼈다는 섬뜩함은 어쩌면 은폐된 과거의 흔적과 그에 대한 억눌린 집단기억의 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일시적 착란에 의한 집단 히스테리였거나 아니면 우리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은폐된 과거가 침묵을 강요당한 노년 세대와 역사의 실상으로부터 차단당한 젊은 세대 모두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과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존엄을 찾기 위해 조용히 투쟁해온 유가족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역사를 올바로 조명하고 과거사의 어두운 잔재들을 청산해나가야 한다. 독자들 중 경산 코발트광산을 답사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추모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가기를 간곡히 당부드린다.

/김용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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