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콩을 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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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콩을 줍다

    • 입력 2020.11.15 00:00
    • 수정 2020.12.08 10:32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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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옛날 우리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노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개 너머에서 시집 온 어머니도 가끔 같은 말을 들었다.

    “눈이 크다고 눈이 아니다. 보는 게 눈이다.”

    할머니는 어떤 까닭으로 저 말을 입버릇처럼 아버지와 며느리에게 했을까? 아마도 산골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깨달은 삶의 철학일 텐데 불행하게도 나는 할머니와 너무 일찍 헤어졌기에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아, 듣기는 했겠지만 갓난아기여서 기억나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더 먼저 이 세상을 떠나셨고. 가끔 고향집에 가서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아버지의 잠꼬대를 듣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애타게 어머니(할머니)를 부르다가 깨어났다. 

    “아버지, 꿈에 할머니 만났어요? 할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하지만 아버지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잠을 청했다. 나는 리모컨의 단추를 눌러 채널을 바꾸는 것으로 궁금증을 달래야만 했다. 어느덧 할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아버지는 매번 꿈에 할머니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듣는 것일까? 왜 그 말을 내게 전해주지 않는 것일까…… 깊어가는 가을밤 할 수 없이 나는 다시 술 단지를 꺼내야만 했다.

    늦가을의 산골마을은 각종 농작물을 타작하느라 바쁘다. 콩, 팥, 수수, 깨 등을 타작할 때 대관령에서는 보통 ‘마뎅이한다’고 불렀다. 콩마뎅이, 팥마뎅이, 깨마뎅이…… 마뎅이는 그러니까 타작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타작 자체를 지시하는 말인 것이다. 그 장소는 농작물을 심은 밭이거나 집의 마당, 아니면 텃밭이었다. 마뎅이는 더 시급한 농사일을 모두 마치고 조금 한가해졌을 때 하는 터라 벌써 서리가 몇 차례 내린 초겨울일 수도 있다. 볕이 좋은 날을 고르긴 하지만 아침저녁으론 추워서 모닥불을 피워야 할 정도다. 마뎅이를 하다가도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천막으로 덮어놓았다가 다시 시간이 나면 펼쳤는데 그게 바로 잡곡이 처한 운명이었다. 

    논보다 비알밭(비탈밭)이 압도적으로 많은 강원도 산골은 예전엔 잡곡 재배가 대세였지만 고랭지채소에 밀려 그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다른 잡곡들은 거의 사라져가고 그나마 활용도가 많은 콩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것도 밭이 아니라 밭둑에서 더부살이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언젠가 나는 그 불쌍한 콩에 대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콩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중 집에서 가장 많이 심는 것은 노란 메주콩과 검은콩이다. 나머지는 강낭콩 종류다. 사실 나는 집에서 재배하는 콩의 종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다른 작물에 비해 비슷한 품종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모님이 부르는 콩의 이름과 바깥의 이름이 전혀 다른 경우도 많았다. 사전이나 농작물 관련 책들을 들여다보면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그 혼란스러움의 중심에 각종 강낭콩과 완두콩이 자리하고 있었다. 팥이 콩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땅콩은 그냥 뒤에 콩 자(字)가 붙어 있어서 콩이라 여겼다.사람 키보다 큰 섶이나 줄을 타고 올라가는 마당가의 덩굴콩은 그저 콩노굿이 예뻐서 꽃이 피었을 때면 한참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다른 작물에 비해 왜 그렇게 다양한 모양과 이름, 용도의 콩들이 존재하는지 곰곰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대단하지도 않은 그깟 콩의 종류에 몰두하느니 차라리 술잔을 기울이는 게 나아 보았다.’

    사실 콩은 흙에서 자라는 동안은 다른 작물들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차라리 식탁에서 더 존재감을 발휘했다. 우리 집의 경우를 볼 때 콩은 식탁의 제왕이었다. 콩으로 만든 된장은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었다. 등이 조금씩 시려오는 늦가을 배추를 넣고 끓인 된장국의 따스함과 시원함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맛이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밥 한 그릇 넣고 말아먹으면 뱃속과 마음이 모두 넉넉해진다. 폭설이 그친 겨울날 마당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온 가족이 모여 해먹는 두부는 또 어떠한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갓 만든 두부에 양념간장을 얹어 한 입 베어 먹으면 그 고소함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그 두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들기름에 지져 먹는 두부구이, 두부조림, 분필 크기로 썰어 넣어 끓여먹는 된장국,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교도소에 갔다 나오면 먹는다는 그 모두부까지. 콩의 전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겨울이 깊어가고 반찬거리가 떨어질 때쯤이면 엄마는 시루에다 콩나물을 길렀다. 하루 두어 번 물을 주면 콩나물을 무럭무럭 자랐다. 그 콩나물로 엄마는 각종 반찬을 만들었다. 무치고, 국을 끓이고, 심지어는 콩나물밥까지 했다. 콩의 전설은 멈추지 않는다. 콩자반, 콩밥, 콩갱이(콩국), 발효시킨 메주로 만든 청국장, 콩떡, 콩국수……

    아버지는 겨울이 되고 눈이 많이 내리면 콩알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 그 안에 싸이나(청산가리)를 넣고 - 당연히 불법이므로 요즘은 하지 않는다 - 꿩 사냥을 했다. 그 콩을 먹은 꿩은 얼마 이동하지 못하고 눈밭에 떨어진다. 어린 시절 우리는 그 콩을 먹은 꿩으로 꿩 만둣국을 끓여먹었다. 비릿한 맛이 일품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콩 요리는 두 가지다. 콩이 여물기 전 콩 줄기째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에 넣고 삶아 콩깍지를 발라낸 뒤 먹는 콩과 겨울밤 화로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튀겨먹는 콩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것은 버강지(아궁이) 앞이고 뒤의 것은 함박눈이 내리는 깊은 밤 화로 앞이다. 그 콩을 먹으며 나는 조금씩 외롭고, 낮고, 가난한 소설가가 되었다. 

    ‘콩깍지 속의 콩이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늦가을이었다. 아버지는 잘 말린 콩짚을 마당에 골고루 펴놓고 도리깨질을 했다. 어머니와 내가 하는 일은 콩을 묶은 단을 나르거나 도리깨로 한번 턴 콩짚을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다시 터는 일이었다. 볕 좋은 가을날 아버지가 도리깻장부를 휘두를 때마다 도리깨 소리가 윙윙 울렸다. 도리깨꼭지에 매달린 세 가닥의 휘추리가 마른 콩대를 때릴 때마다 사방으로 노란 콩알들이 혼비백산 튀어나갔다. 나도 해보겠다고 우겼지만, 도리깨질은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냐며 번번이 무시당했다. 그저 꺼끌꺼끌한 콩 단이나 부지런히 안아서 날라야만 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 나는 콩사탕이 정말 싫어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당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선 심심찮게 각종 웅변대회가 열리곤 했는데 운동장에서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웅변을 듣는 일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나는 콩깍지에서 튀어나오는 콩알에 온몸을 가격당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동네 아저씨의 방문으로 마침내 벽에 기대놓은 도리깨로 슬금슬금 다가갈 수 있었다. 도리깨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저편에서 술을 마시는 아버지와 아저씨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장검의 손잡이처럼 두툼한 도리깻장부를 두 손으로 잡고 몇 번의 탄력을 이용해 힘차게 휘둘렀다. 그러나 뒤편에서 원을 그리며 날아온 휘추리는 정확하게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아이고! 사방으로 콩알이 튀어나가는 게 아니라 눈알이 빠져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늦가을의 콩마뎅이가 얼추 끝나면 여섯 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아버지와 엄마가 마뎅이를 마친 콩을 자루에 담을 때 어린 우리들은 마당에 깔아놓은 천막 밖으로 달아난 콩을 일일이 주워야 했다. 콩을 줍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두워져서 잘 보이지 않았고 날이 추워지면서 점점 손이 곱아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화단 속으로 들어간 콩은 자그마한 돌과 자주 혼동을 불러 일으켰다. 어느 게 콩인지 돌인지 헛갈리기 일쑤였다. 다음날 싸리나무로 엮은 소쿠리 안에 무엇이 많이 들었는지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중엔 콩을 집으려 해도 곱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의 어느 늦가을 저녁은 보이지 않는 콩을 줍다가 저물어갔다.

    요즘도 가끔 고향집에 가서 하룻밤 머무는 날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홉 시 뉴스가 끝나기도 전에 곤한 잠을 청한다. 나도 술 한잔 마시고 벽에 기대앉아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아무리 채널을 돌리지만 결국엔 ‘나는 자연인이다’에 돌아와 멈춘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잠을 자다 꿈을 꾸고 그 꿈의 마지막쯤이 되면 어머니(나의 할머니)를 간절하게 부르다가 깨어난다. 나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할머니가 꿈에 뭐라 그러셨는데요?”
    “눈이 크다고 눈이 아니다. 보는 게 눈이다.”
    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대답을 하신다. 그러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할머니, 그래도 저물녘 콩 줍는 일은 정말 싫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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