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해, 저 붉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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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해, 저 붉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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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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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저 붉은 얼굴

                                        이 영 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그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버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이영춘:1976년『월간문학』등단*시집「슬픈 도시락」「노자의 무덤을 가다」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심의위원.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어제는 한 지인에게 메일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그 지인으로부터 그의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지인은 아버지가 80세가 훨씬 넘으신 고령임에도 암 수술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술을 해 드려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자문을 청했다. 나는 단호히 수술하다가 잘못 되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 드려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 권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문득 생각이 나서 수술을 해 드렸느냐고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답장이 왔다. 이미 돌아가시고 엊그제 49제를 마쳤다고. 그는 주위에 미처 알리지도 못하고 장례를 치러 미안하다고까지 했다. 나는 지인의 아픔이 나에게로 전해 오는 듯 가슴이 저렸다. 새삼 돌아가신 내 부모님 생각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실 때 잘 못해 드렸던 일에 대한 후회였다.
 
내 나이, 삼십 대 초반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느닷없이 찾아 오셨다. 아버지가 딸네 집에 찾아오시는 예는 극히 드문 일이다. 더구나 셋방살이 하는 딸을 찾아오시리라고 나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셨다. 저녁을 잡수시고는 별 말씀 없이 그냥 그날 밤을 보내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내가 부랴부랴 출근하려고 녹 쓴 철대문을 밀고 골목길을 막 돌아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아버지가 야야, 야야- 하고 부르신다. 왜 그러시냐며 돌아섰더니 겨우 입을 여신다. “너---, 돈--- 한 삼십 만원 없겠니?!‘라고 하신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한 3백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사는데 무슨 돈이 있어요?! 라고 야박하게 쏘아부치고는 급하게 출근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내가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야 그렇게 내뱉었던 말이 평생 내 가슴속에 쇠못으로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저려온다.)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그 때 그 돈을 못해 드려서 미안했다는 말을 드렸어야 했는데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하신 채 아버지는 2002년 어느 봄날, 이 지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평생 처음으로 딸에게 꺼냈던 그 말이 무참하게 거절을 당했을 때의 아버지 심정이 어떠했을까? 남에게 돈을 부탁하다가 거절당해도 무안하고 비참한데 하물며 딸에게서 거절을 당했을 때의 아버지의 심정은 오죽하셨을까? 지금까지도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恨으로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무가 고요히 머물려 해도 바람은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봉양코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子欲養而親不待)라는 옛 고사가 가슴을 흝고 지나가는 후회막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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