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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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는 영혼

    • 입력 2020.11.08 00:01
    • 수정 2020.12.08 11:01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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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20세기 중후반 새로운 세대의 독일 영화를 이끌었던 ‘뉴 저먼 시네마’의 세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인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1974년에 만들어졌지만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된 건 20세기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명징한 제목 덕분에 별달리 영화광이 아닌 사람도 이 영화의 ‘실체’는 어지간히들 파악하고 있었다. 60대의 독일 여성이 남편의 장례를 치른 날 10세 연하의 아랍계 이주 노동자와 사랑을 나누는 걸 보았을 때, 만들어진 지 30년 가까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뒷머리가 묵직해지던 기억이 새롭다. 그 느낌은 ‘영혼에 잠식당한 불안’과 비슷했다. 

    이 영화가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 못한 이유를 짐작해보는 게 얼마나 실익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영화에 남자의 성기가 그대로 노출된다거나 남편의 장례식날 정사를 치르는 여성과 이주 노동자를 다루는 등 윤리적·정치적으로 껄끄러운 문제들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리뷰에 나오는 “70년대 독일 사회에 잔재한 파시즘을 공격하고, 독일 사회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한 영화”라는 대목이 아마도 당시 우리 사회에 이 영화가 수용되지 못한 진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을까 싶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강렬함, 혹은 불편함은 ‘잠식’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다. 원제목인 <Angst essen Seele auf>에서 ‘essen’은 영어의 ‘eat’에 해당하는 것으로, 대개는 음식을 먹는 온건한 행위를 가리키지만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거나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는 뜻으로도 옮겨질 수 있는 단어다. “누에〔蠶〕가 뽕잎을 먹듯이〔食〕 점차 조금씩 침략하여 먹어 들어간다”는 뜻의 한자어 ‘잠식(蠶食)’은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는 것에 부합한다. 불안은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영혼을 갉아 먹는다 - 섬뜩하고 께름직하고 불편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정황이 아닐 수 없다. 불안이란 정말 그렇다.

    안심이 되지 않아 조마조마한 상태를 가리키는 불안은 키에르케고르, 니체,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실존주의 철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실존이 지니는 본질적 모순에 근원적으로 붙어 다니는 기분, 이것이 바로 불안이다. 언제 올지 알 수는 없으나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마는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의 불안은, 절망과 함께 피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피하고 싶은, 그래서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감성이다. 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피하려 시도하고, 그러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미국의 명상가 제프 포스터의 <The joy of real meditation(진정한 명상의 즐거움)>이라는 책에는 ‘불안’에 대한 매우 실용적인 해법이 제시돼 있다.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전면적 수용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삶으로 돌아온 저자의 경험이 담긴 이 책에서 포스터는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꾸역꾸역 가슴 저 밑바닥으로 눌러 앉히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떠오른다. 다시 떠오를 때 그것은 더욱 크고 깊고 끈끈하고 완강해진다. 그때 불안은 우리 자신보다 더 커져 있고, 제어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보다 큰 존재다. 불안은 우리가 당연히, 거의 매일 느끼는 감정이고,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불안이라는 에너지가 우리 자신이 가진 에너지임을 알게 된다. 그 에너지는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다.”라고, 진지하게 역설하는 제프 포스터의 ‘불안론’은 불안이 우리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는 장면을 묵묵히 바라보고 그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잠식당한 영혼이 회복되는 경이로운 정황을 보여준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병’으로부터 ‘회복’으로 돌아선다는 것 - 물리적 법칙 안의 존재에게 신비란 이런 것이다. 몸이 공중에 떠오르거나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닌.

    우리가 연약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해지는 것은 우리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부정적인 생각은 ‘생각’이라는 인간적 특성들 가운데 하나다. 부정한 생각은, 불안은, 절망적 감정은, 억누를 순 있지만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것은 불안을 껴안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팔을 벌려 불안을 껴안을 때 불안은 더 이상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쉽지는 않으나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던 한 젊은 개그우먼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애도의 기도 중에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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