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역사를 일군 103명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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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의 뒤적뒤적] 역사를 일군 103명의 여성들

    • 입력 2020.11.02 00:00
    • 수정 2020.12.08 11:02
    • 기자명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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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지구 최후의 식민지”

    여성의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 많이 쓰이는 수식어입니다. 열렬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직장에서의 보이지 않는 여성 차별을 가리키는 ‘유리천장’이나 금전적으로 무시되는 전업주부의 가사노동 등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아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인류의 절반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이름난 국가지도자, 장군, 탐험가, 사상가, 과학자 등을 꼽자면 얼른 떠오르는 여성은 드뭅니다. 심지어 여성에게 유리해 보이는 화가 중에도 여성의 이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손에 꼽힐 정도에 그칩니다.

    이토록 잊힌 여성의 이름을 역사에서 소환한 책이 있습니다. <있어빌리티 교양수업: 역사 속 위대한 여성>(사라 허먼 지음, 토트)이 그 책입니다. ‘있어빌리티 교양수업’이란 시리즈 중 한 권인데 세계사에서 주목할 만한 여성 103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성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남성만큼 많이 먹을 수 있으며, 채찍질을 받아야 한다면 남성만큼 잘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성이 아닌가요?”

    이건 미국의 순회전도사 겸 노예폐지론자이자 여성 권리 옹호자인 흑인 여성 소저너 트루스가 1851년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여성 권리대회에서 한 연설 중 일부입니다. 이 대회 이튿날 남성 목사들이 여성은 나약해 투표할 자격이 없다며 여성 투표권 요구에 이의를 제기하자 트루스가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 책이 아니고는 트루스의 이름을 쉽게 만날 수 없지만 상대성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의 첫 부인 밀레바 마리치 역시 귀에 익은 이름이 아닙니다. 마리치는 취리히 폴리테크닉대학교에서 아인슈타인과 함께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던 재원입니다. 1903년 결혼 전 아이슈타인은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연구’라고 거듭 언급합니다. 한 지식인 모임에선 “아내가 꼭 필요합니다. 저 대신 수학문제를 다 해결해주거든요”하고 했다는 기록도 있고요. 1919년 이혼할 때 아인슈타인은 만일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은 마리치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죠. 하지만 마리치는 아인슈타인이 받은 어떤 상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영화사에서는 영화의 탄생일은 1895년 12월 28일을 꼽습니다. 발명가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자신들의 영화필름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상영한 날이거든요. 상영시간이 고작 1분 미만인 이 ‘영화’에서 기차가 다가오는 장면을 본 관객들이 혼비백산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한데 그 자리에 알리스 기 블라쉐란 여성이 앉아 있었습니다. 발명가 레옹 고몽의 사진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던 그녀는 어느 날 고몽에게 카메라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고는 움직이는 열차나 군중 등을 찍던 당시의 다큐멘터리 영상과 달리 ‘이야기’가 담긴 영상을 찍었습니다. 요정처럼 차려 입은 여성이 양배추 밭에서 아기를 찾아내는 영화 ‘양배추 요정’이 그것입니다.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었던 기 블라쉐는 이후 고몽 영화사의 책임자가 되어 특수효과와 노출 기법 등을 실험하며 1896년부터 1920년 사이에 약 600편의 무성영화와 150편의 유성영화를 만들어 영화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깁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정작 여성 영화감독은 손에 꼽을 정도인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밖에도 책에는 대단한 여성들이 줄이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와이파이와 GPS 위치추적 등 오늘날 정보통신의 토대가 되는 무선 기술로 특허를 받은 헤디 라마는 아카데미상 후보로도 오른 ‘삼손과 데릴라’ 등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던 미인 배우입니다. 아프리카의 가나를 정복했던 영국군에 맞서 부족들을 이끌고 3개월간 요새 공격전을 펼쳤던 ‘아프리카의 잔다르크’ 야 아산테,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등으로 구성되어 ‘살인타선’으로 불리던 미국 프로야구 명문 팀 양키스를 상대로 1931년 삼진 퍼레이드를 벌인 17세 소녀 재키 미첼, 1894년 15개월에 걸쳐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일주한 세 아이의 엄마 애니 런던데리 등을 만나는 일은 흥미롭고, 뜻 깊은 일일 겁니다.

    아, 유의할 대목이 있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다음날 상대 남성을 처형하곤 했다는 아프리카 자자우족의 여왕 아미나 등의 이야기도 있으니 책 제목 중 ‘위대한’이란 표현에 너무 집착할 건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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