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이상한 감기의 기이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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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이상한 감기의 기이한 역사

    • 입력 2020.10.27 00:00
    • 수정 2020.12.08 11:04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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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하와일록(河窩日錄)』이라는 책이 있다. 천년 이상 이어져오던 유학을 성리학의 틀에 넣어 정리한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주자)와 그의 학설을 다시 정리해 중국에조차 당해낼 학자가 없다 해서 ‘해동주자’로 불리었던 퇴계 이황(李滉)의 학설을 깊이 연구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유의목(柳懿睦)이 만 7년 동안 쓴 일기다. 그런데 이 일기가 시작된 해는 1797년(정조 21), 유의목의 나이 겨우 열세 살 때였다. 열여덟 살 때인 1802년(순조 2)까지 이어지는 이 일기를 엮은 책의 첫머리에는 그가 스물두 살(1806)에 쓴 서문이 실려 있다. 

    “자신을 반성하여 고칠 수 있고, 흉년과 풍년이 든 해를 구분할 수 있으며, 착한 것과 착하지 못한 것을 모두 기록해두면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는 이유가 솔직하기 그지없다. 그의 일기에는 당시의 일기가 그렇듯 매월, 매일의 간지(干支)와 날씨가 쓰여 있고, 하루의 일과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떤 손님들이 찾아왔는지, 부친이 언제 서원이나 향교로 출타를 했는지 같은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세상을 떠난 부친의 마지막 모습과 장례의 풍경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에 해당하지만 유의목의 관찰과 성찰은 치밀하고 깊다. 모친이 병이 나서 몸져누웠는데, 자신마저 건강이 좋지 못해 20여일씩이나 일기를 쓰지 못하는 심정이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쓰여 있는 대목에 이르면, 저절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점필재집』, 『대학연의』, 『맹자』, 『학사집』 등 그날그날 자신이 읽은 책을 기록하거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대성무열성인장효대왕(大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해졌다는 안동부사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한 것은 『하와일록』이 사료적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기록문학으로서도 귀중한 자료임을 말해준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유세철(柳世哲)의 후손으로, 어려서 조부인 유일춘(柳一春)으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닦고, 커서는 영남학파의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배운 유의목은 사후에 『수헌선생문집(守軒先生文集)』을 남겨 그의 학문과 덕행을 짐작하게 해주는데, 가령 문집에 수록된 「금강산오선암기(金剛山五仙巖記)」는 금강산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매우 뛰어난 유산기(遊山記)이다.

    유의목의 할아버지 유일춘은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안동 하회마을의 문장(門長)이었다. 『하와일록』은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관아와 향청, 서원 등지에서 보내오는 통지문과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그들과 나눈 얘기들이 낱낱이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필요한 부분에 주석까지 달려 있다. 그런데, 『하와일록』 가운데 정조 23년(1799) 2월 22일의 일기에는 안동 하회마을에 발생한 해괴한 돌림병 얘기가 나온다. “구름이 끼고 흐렸다. 하회마을에 해괴한 감기가 유행하고 있는데, 이것에 걸리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17일에는 온 고을에 ‘소고기를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소를 잡아대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네다섯 마리는 잡는 듯하다. 오늘 들으니 안동부에서 이 감기로 죽은 사람이 모두 4백여 명이라고 한다.” 읽다 보면 금방 떠오르는 게 있다. 코로나19다. 하회마을에 닥친 ‘이상한 감기’의 실체가 드러나는 대목에선 갑자기 SF로 발전한다.

    감기는 청나라로부터 전해졌다는데, 들리는 얘기로는 의주부윤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내일 만주족 승려가 강을 건너갈 텐데 배를 지키는 사람에게 미리 일러 그가 차고 있는 주머니 세 개를 빼앗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의주부윤은 꿈이 워낙 생생해서 진짜로 뱃사람 네 명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무슨 변괴인지 승려 하나가 홀연히 강을 건너왔다. 놀란 뱃사람들은 승려에게 달려들었고, 승려가 차고 있던 주머니 셋 중 둘은 빼앗았지만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붉은 기운이 허공을 떠돌다 사라졌는데, 뱃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모두 즉사했다. 승려가 차고 있던 세 개의 주머니는 각각 감기 주머니, 창질 주머니, 호역 주머니였다. 뱃사공들은 창질 주머니와 호역 주머니는 빼앗았지만, 결국 빼앗지 못한 감기 주머니가 온 나라에 병을 퍼뜨리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빙긋이 웃다가 심각해진다. 지금이라도 감기 주머니를 찾아 꼭꼭 여몄으면 싶다. 코로나19가, 너무, 오래, 참, 질기게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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