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나의 코흘리개 사촌들
상태바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나의 코흘리개 사촌들
  •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18 0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어린 시절 추석 명절이 지나가면 우리 코흘리개 사촌들이 기다리는 집안 행사가 또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사였다. 전사는 음력 시월에 5대 이상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시제(時祭)라고 부른다는 것은 소설가가 되어서야 알았다. 조상들과 후손이 꿈속에서 만나는 다소 환상적인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책으로 출간되기 전 교정을 보는 편집자가 전사란 낱말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강원도 사투리인 듯하니 표준어인 시제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신인소설가였던 터라 편집자의 의견을 따랐지만 기분이 그리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러 험하고 높은 산을 올라갔던 나의 어떤 기억은 ‘전사’란 낱말에 담겨 있는 것이지 ‘시제’란 낱말이 불러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을 쓰면서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소설가라면 나름대로 국어공부를 다른 사람들보다는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첫 소설책을 내려고 준비하던 중 출판사에서 교정지가 왔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자는 내 글에 들어 있는 무수한 사투리와 비표준어에 빨간 밑줄을 긋고 의견을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그것을 그대로 사용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의 사투리, 비표준어, 모어(母語)를 모두 표준어로 바꿔야만 했다. 그나마 대화에 들어간 것들은 다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소설을 다 쓰면 다시 사전과 인터넷을 뒤적거려야만 했다.

표준어는 일종의 도량형을 통일시킨 것과 비슷하다. 강원도의 콩 한 말이 서울의 콩 한 말과 양이 다르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한 나라의 말을 통일한 표준어는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팔도의 여러 낱말들 중 어떤 낱말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표준어로 정할 것인가에 있다. 그래야만 표준어에서 탈락한 낱말의 설움을 달래줄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강원도 말은 거기에서 가장 큰 소외를 당하고 있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제목으로 붙인 나의 코흘리개 사촌들의 전사 이야기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 나를 포함해서 나의 코흘리개 사촌들은 어린 시절 거의 대부분 한 마을에 모여 살았다. 건넛마을엔 고모 집, 윗마을에 큰댁, 작은 고모 집, 작은 할아버지 댁 등등이 있어서 우리 코흘리개들도 왕래가 자유로웠다. 그런 우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은 당연히 맛있는 음식들을 맘껏 먹을 수 있는 명절이었다. 명절이라면 설날과 추석인데 우리 코흘리개 사촌들은 전사를 명절의 반열에 추가하는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설날의 정점이 친척집을 방문해 맛있는 것을 먹고 세뱃돈을 받는 것이라면 추석의 핵심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가는 일이었다. 문제는 산소가 그리 가깝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우리들은 절대 개의치 않았다. 할아버지 산소까지는 산골짜기 길 오 리, 그리고 할머니 산소까지는 거기에서 다시 산길 오 리니 도합 십여 리 길이었다. 산골짜기 길과 산길은 엄연히 다르다. 산길은 산골짜기 길을 질러가는 길이니 가깝지만 훨씬 험하다. 그 길을 우리는 걸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흔들거리는 징검돌을 밟아 개울에 빠지면서. 어느 해는 길옆의 땅벌 집을 건드려 성묘를 가던 친척들은 모두 꽁지가 빠져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뭇가지를 꺾어 벌을 쫓아내는 소란이 가라앉자 사촌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벌에 볼을 쏘였던 것이다. 사촌의 볼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하지만 나의 꿋꿋한 사촌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고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할머니 산소까지 따라왔다. 물론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산소에 따라가야만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 산소에 도착해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절을 하고 한 자리에 둥그렇게 둘러앉았을 때 음식까지 입에 들어간 사촌의 볼은 거의 축구공으로 변해 있었다. 히죽히죽 웃을 땐 마치 축구공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전사를 지내는 일은 문중이 모이는 일이기에 추석의 성묘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나의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함경도 사람이었다. 그는 저 옛날 남쪽으로 내려올 때 다시 못 돌아갈 것을 예감하고 부모의 묘를 파서 뼈를 추려 등에 지고 대관령으로 왔다. 새로 묘를 쓸 자리를 물색하던 그는 후손들이 잘 되라고 대관령 장군바위 아래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옆에 오두막을 짓고 화전을 일궜다. 증조할아버지의 그 선택으로 후손들은 낯선 남쪽 땅 대관령에서 조금씩 번성하여 나의 코흘리개 사촌들 세대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르자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곤란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세가 안정되면서부터 산소만 장군바위에 남겨놓고 사람들은 산 아래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게 바로 문제였다. 일 년에 한 번씩 성묘를 하러 장군바위로 올라가  는 일이 점점 쉽지 않게 된 거였다. 장군바위는 해발 천여 미터가 넘는 높은 산 위의 바위였기에 가고 오는 일이 거의 등산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의 코흘리개 사촌들은 어른들이 오지 말라 하여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매년 산을 올랐다. 산을 넘고 또 넘었다. 바위를 오르고 내려왔다. 제사를 지낼 짐을 잔뜩 진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산길인데 나의 코흘리개 사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뒤에야 마침내 장군바위 아래 산소에 띄엄띄엄 도착했는데 그나마 시야가 탁 트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어른들의 불만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우리야 오직 먹을 생각밖에 없었지만.

  “묘를 산 아래로 이장하는 게 어때요?”
 
맨 마지막으로 헉헉거리며 산소에 올라온 친척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하면 돌아오는 문중 어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여기에 묘를 쓴 건 장군바위의 기운을 받아서 후손 중에 장군이 나오라는 뜻인 게야.”
  “……아직 한 명도 안 나왔잖아요.”
  “곧 나오겠지.”
  “장군 나오길 기다리다 고뱅이(무릎)가 남아나질 않겠어요.”

 다시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자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문중의 어른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장군바위에 전사 지내러 가는 게 일 중의 일이 된 것이었다. 우리 코흘리개 사촌들도 벌초를 할 나이가 되었는데 그 일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전사나 벌초에 빠지는 친척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해는 결국 산에 올라가지 않고 산 입구에서 장군바위가 있는 산을 바라보며 전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낭 해 장군바위 벌초를 마친 우리 사촌들은 말끔하게 풀을 깎은 산소 앞에 앉아 음식과 술을 마시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래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어.”
  “나도 그래. 좀 힘들었지만 정말 즐거웠어. 과자나 사탕도 엄청 맛있었지.”
  “우리 집안에 아직 장군이 안 나왔지?”
  “여기 가난한 소설가 한 명 나왔잖아요.”
  “……소설가가 장군은 아니지.”

마지막 벌초였다. 문중 회의 결과 산소를 없애고 대신 산 아래 문중 땅에 비석을 세우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 코흘리개 사촌들의 자식들은 우리처럼 산꼭대기 장군바위에 전사 지내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얘긴데 그것은 행일까, 불행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