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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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 입력 2020.10.04 00:01
    • 수정 2020.12.08 11:47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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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밤이 깊어지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앉은뱅이책상 옆에 세워놓은 등잔불이 자꾸만 일렁거렸다. 불꽃이 위로 향하지 않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옆으로 가느다랗게 누우면 나는 재빨리 연필을 놓고 두 손으로 등잔불을 감쌌다. 그러면 등잔불은 넘어지려던 몸을 겨우 추스른 뒤 가까스로 일어났다. 방문을 모두 닫았지만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낮에 놀지 않고 숙제를 모두 끝냈더라면 나도 엄마 아버지를 따라 윗마을 큰댁으로 놀러갈 수가 있었는데 마을 친구들과 어울러 운동장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공을 찬 게 원인이었다. 결국 혼자 산골짜기 외딴 집에 남아 등잔불 아래서 숙제를 하느라 궁상을 떨게 되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너 혼자 집 볼 수 있겠어?”
    “나도 이제 다 컸어. 걱정 마.”

    작은누나는 아예 큰집에서 자려고 책가방까지 챙긴 채 내게 물었다. 사실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지만 나는 애써 감췄다. 엄마와 아버지는 새벽에 돌아올 예정이고 누나는 큰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등교할 예정이었다. 부럽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워낙 무서워서 숙제를 안 해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깜깜해지면 무서울 텐데.” 
    “괜찮아, 누렁이가 있잖아.”

    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가축이 바로 누렁이였다. 누렁이는 낯선 사람이나 산짐승들이 집으로 접근하면 어느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채고 사납게 짖는 개였다. 한 마디로 든든한 수문장이나 다름없었다. 언젠가 뜨내기 엿장수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가 빈 집이란 걸 알고 부뚜막에 걸려 있는 솥을 훔쳐가려다 산 아래 비알밭에서 집까지 달려온 누렁이에게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누렁이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똑똑한 개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내가 누렁이를 데리고 동네에 산책을 나가면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목줄도 없이 든내놓고(풀어놓고) 키우는 개임에도 불구하고 누렁이는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고 옆에서 지켜주는 든든한 호위무사였다.

    책상 앞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숙제를 모두 끝마치니 밤 열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된(뒤란)으로 나가 방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등잔불빛이 사라지는 곳에서 소변을 보았다.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캄캄한 뒷산에서 내려오는 쏴아아- 하는 바람소리가 마치 지난여름의 장마에 큰물이 흘러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겨울인 듯 바람은 차가웠고 나는 온몸을 후드득 떨었다. 인기척을 채고 된으로 찾아온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어 내 다리를 툭툭 쳐주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보초 잘 서야 돼.”

    누렁이는 걱정 말라는 듯 내 손등을 혀로 핥아주었다. 하지만 늦가을 밤 산골짜기의 어둠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캄캄해 살짝 겁이 났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숙제를 할 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혼자서 집을 보는 건(지키는 건)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날 몇 시간 동안 집을 본 게 다였다. 그땐 환한 대낮이라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혼자 있는 밤은 왠지 달랐다. 스산한 바람소리마저 왠지 수상했다. 바람이 건드리고 지나가는 낯선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믿음직한 누렁이가 바깥을 지키고 있지만 누렁이보다 더 힘세고 무서운 무엇인가가 산골짜기 외딴 집으로 찾아온다면? 귀신이나 무장간첩?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내 마음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선 방문부터 하나씩 걸어 잠갔다. 문은 윗방에 두 개, 안방에 세 개였다. 문에 달린 동그란 들쇠를 문틀에 박아놓은 걸쇠에다 걸었는데 혹시 몰라 숟가락까지 가져와 거기에 일일이 끼웠다. 가만…… 벅(정지, 부엌)으로 침입한다면? 나는 벅으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가 호야에 불을 붙였다. 벅에도 앞문과 뒷문이 있었는데 잠금장치가 시원찮아 고심하다가 가느다란 밧줄로 문고리를 묶어놓고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실 시골집의 문들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힘센 누군가가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창호지를 바른 문쯤은 간단하게 부숴버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대문도 없었다.

    된에서 무엇인가가 덜컹거렸다. 나는 동굴 같은 솜이불 속에 들어가 베개를 베고 엎드려 머리만 이불 밖으로 내민 채 빌려온 책을 읽었다. 이번에는 앞마당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누렁이가 짖었다. 책을 밀쳐놓고 이불 속에서 기어나가 문창호지를 오려내고 붙인 손바닥만 한 유리창에 조심스럽게 눈을 대고 바깥을 살폈다. 달빛이 어른거리는 마당엔 아무도 없었다. 대문 없는 대문 밖으로 이어진 길에도 미루나무 그림자만 바람에 일렁거렸다. 누렁이도 자기 집에 들어가 나처럼 귀와 눈만 열어놓은 채 바깥의 동정을 살피는 모양이었다. 나는 작은 유리창 너머의 검고 시퍼런 밤의 곳곳을 점검한 뒤 다시 솜이불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큰 바위 얼굴’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책은 흥미로웠으나 책의 내용 바깥에 암초가 많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엔 윗방의 뒷문이 자그맣게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도둑처럼 문을 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 뒤편에서 갑자기 쿵! 하는 소리도 피어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누가 담을 넘어왔단 말인가! 나는 책을 덮고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며 소리의 출처를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사실 대부분의 소리들은 바람이 만든 것일 게 틀림없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자꾸만 상상의 가지를 여기저기로 끌어가고 있었다. 덩달아 등잔불도 휘청휘청 흔들거렸다. 때맞춰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평소보다 엄청나게 큰 소리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열한 번이나. 

    숙제를 해가지 않아 담임선생님께 혼이 나더라도 엄마 아버지를 따라 큰댁에 갔어야 했다. 책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을 잘까? 과연 잠이 올까? 지금이라도 누렁이를 데리고 큰댁에 갈까? 아냐. 가면 다들 혼자 집 지키는 게 무서워서 왔다고 놀릴 거야. 나는 이불 속에 엎드려 흔들거리는 등잔불을 보며 고민을 했다. 혼자서 집을 보는 게 이렇게 힘들고 무서울 줄은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처럼 술을 마시고 잠들어 버릴까? 아버지가 먹다 남긴 술이 벅에 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쪽문을 열고 벅으로 가는 일도 엄두가 나지 않는 밤이었다. 

    석유가 떨어져 등잔불마저 꺼진 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잠을 자려고 뒤척거렸다. 석유가 담긴 병은 헛간 벽에 걸려 있어서 가지러 갈 수도 없었다. 호야(남포등)가 있었지만 연기 때문에 방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불 속에서 꼼짝 않은 채 어서 빨리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괘종시계가 아까보다 더 크게 열두 번을 울렸는데 마치 범종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다행히 바람이 다소 누그러졌는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까처럼 사납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불안들이 살금살금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전설의 고향’에서 본 귀신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불 밖에는 소복을 입고 피를 흘리는 처녀귀신이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가 공중제비를 하는 공동묘지에 누워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음속의 겨우 쫓아내자 이번엔 총을 든 무장공비들이 이승복의 집에 들이닥친 것처럼 내가 홀로 있는 집의 방문을 곧 부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뭐라고 소리치지?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잠들기 전의 상상은 꿈속까지 따라와 나를 악몽 속에 떠다니게 만들었다. 

    ‘가을밤 고요한 밤 잠 안 오는 밤’이 아니라 가을밤 무서운 밤 식은땀 줄줄 흐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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