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쓰는 산문] 그대 지금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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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쓰는 산문] 그대 지금 행복한가?

    • 입력 2020.09.21 00:00
    • 수정 2020.12.10 14:06
    • 기자명 이향아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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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아 시인·수필가
    이향아 시인·수필가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인터넷 수업으로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러나 인터넷 수업을 하고 있는 현재의 형편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 학생과 학부형도 있다.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왔는데 새 학기에도 같은 반에 편성되어 걱정이 많았다고 하였다. 개학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학교에 갈 일이 암담했던 아이가 지금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인터넷 수업을 받는다면서, 이렇게 대면하지 않고 지내다보면 그간에 쌓였던 오해도 증오심도 없어져 버리지 않겠는가 희망을 걸기도 하였다.

    학교에서의 왕따 현상이 어제오늘 새로 생긴 일은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따돌림’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했다. 운동장에서 땅뺏기나 줄넘기를 하다가도 티격태격 싸우고, 그러다가 패싸움이 되고, 그 중에서 특별히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있었다. 교실에서도 선생님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거나, 성적이 뛰어나서 줄곧 칭찬만 듣는 아이가 있다. 본인으로서는 기쁘겠지만 그 학생을 제외한 다른 학생은 부러움을 느끼고 질투심을 느끼고 낭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칭찬받은 아이가 분별없이 기쁨을 폭로하고 제 처지를 마음껏 과시할 때는 질투심과 낭패감이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따돌림과 오늘날의 왕따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왕따가 따돌림보다 더 적극적이고, 왕따가 따돌림보다 더 폭력적이며, 왕따가 따돌림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범위가 넓다. 한마디로 옛날보다 지금이 훨씬 강화되고 악화되었다. 그것은 옛날과 현대라는 시간의 특성이기도 하고, 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에 형제들이 모두 부모의 꾸중을 듣는데 혼자서만 무사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꾸중을 듣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꾸중을 듣는 편이 열 배나 나을 것처럼 불안하고 괴롭다. 더구나 언니나 오빠가 편하게 앉아있는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거나 ‘있다가 두고 보자’는 식으로 주먹질을 하면 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에 경쟁은 없을 수가 없다. 경쟁이란 어떤 종류의 것이든 피곤하고 괴롭지만, 우리는 운명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크고 작은 경쟁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고 귀가 아프게 들으며 자랐다. 선의의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승리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지고 있는 나를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고. 상을 받고 칭찬을 듣는 사람이 반드시 똑똑하거니 우수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꾸중을 듣고 벌을 받는 사람이 반드시 문제아여서 그런 것이 아닌 것처럼. 

    소위 타이밍이 잘 맞아서 칭찬을 들을 수도 있고, 운이 나빠서 벌을 받을 수도 있으며, 무엇인가 꼬이고 잘못 처리되어서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왜 따돌리느냐고 물으면, ‘아니꼬우니까’, ‘잘난척하니까’라고 말한다. 아니꼽다는 것은 앞서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서가면서 자신의 기쁨에만 몰두해 있는 꼴이 보기 싫다는 것이다.
     
    질투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일마다 어긋나고 실패하여서 불쌍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동정할망정 따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따돌리는 사람보다 좋은 조건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왕따를 당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일 때는, 이렇게 한 번 돌아다봐야 한다. 나의 어떤 언행이 저 사람들을 화나게 하였는가? 나의 어떤 요소가 다른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조장하고 소외감을 증폭시켰는가? 내가 지금 행복하다면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큰 손해를 봤을 수가 있고, 누군가가 엄청난 희생을 당했을 수도 있다. 나의 합격은 누군가가 불합격을 딛고 성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쁨과 행복을 미안한 마음으로 겸허하게 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따돌림을 당한 사람보다 따돌린 사람들이 더 크게 반성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처음부터 소외감을 느낀 사람은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따돌린 사람이지만,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진 열등감과 소외감을 남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 원인을 내게서 찾지 않고 남의 잘못인 듯 핑계를 대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고 비겁하다.

    남을 미워하고 따돌려서 얻은 것이 있던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의 심술은 마음만 더 포악하게 할 뿐이다. 정당하고 깨끗한 경쟁을 해야 한다. 이 세상에 증오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증오는 어느 경우든지 우리들의 심성을 비뚤어지게 하고 세상을 더 시끄럽게 할 뿐이다.

    어떤 한 사람을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학대하거나 몰매를 때려 결국 죽게까지 하는 일도 있다. 이런 현상까지 ‘왕따’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살인이요 폭행이지 왕따가 아니다. 이런 것까지 왕따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은 폭행과 살인을 미화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도 깊이 헤어려 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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