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영화 ‘나비효과’와 인과관계(因果關係)라는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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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영화 ‘나비효과’와 인과관계(因果關係)라는 이데올로기

    • 입력 2020.09.14 09:09
    • 수정 2020.12.10 14:08
    • 기자명 이황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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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2004년 작 ‘나비효과(감독 에릭 브레스)’의 도입부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에 이론을 간략히 설명한 자막이 나온다. 정관사를 붙인 영화의 제목(The Butterfly effect)이 바로 그 유명한 카오스이론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전략은 어떤 효과를 기대하게 되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나비효과에 대해 ‘구글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이론에 영화의 장면을 접목시켜 해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 되면 다른 생각을 할 여지는 없다. 어떤 자극을 반복해서 주게 되면 동일한 조건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반응을 하게 되는 파블로프의 개의 실험처럼, 관객들 역시 반사적으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한 ‘양식적 반응’을 하게 마련이다. 영화는 바로 그러한 점을 노린다.

    복잡한 영화의 플롯을 단순화시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골에 사는 네 명의 아이들(에반,  에반의 여자 친구 캘리, 캘리의 오빠 토미, 그리고 래리)은 우연히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넣게 된다. 장난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 어떤 집 우편함에 집어넣는다. 멀찍이 떨어져 폭발의 짜릿함을 기다리던 녀석들은 순간 경악(驚愕)하게 된다. 이후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퍼즐처럼 조각을 맞춰나가야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끔직한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 에반이 충격으로 사건에 대한 기억 대부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사건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애써 떠올린 기억의 파편을 쫓아가서야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때마침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온 집주인이 우편함을 열게 된 것이었다. 동시에 폭발이 일어나고 엄마와 아기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저마다 아이들은 상처를 입게 되고 이후 삶은 엉망이 된다. 

    심약한 래리는 정신적 장애를 앓게 되고, 토미 역시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과 더불어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소년원을 전전하다가 범죄자로 낙인이 찍힌다. 캘리 역시 시골의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무기력하게 지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건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만이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숙사에서 에반은 어려서부터 기억상실증을 치료하려고 작성한 일기장을 우연히 다시 꺼내보게 되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실체에 대한 일부를 기억하게 된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고향에 내려오고 엄마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캘리를 찾아간다. 

    그런데 무심히 던진 에반의 말에 캘리의 마음의 상처는 곪아 터지게 되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대학캠퍼스로 돌아온 에반은 캘리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소식을 뒤늦게 서야 전해 듣게 된다. 죄의식으로 번민하던 에반은 자신의 기억을 되돌리는 ‘차원의 문’인 일기장을 통해 모든 일을 원점으로 돌려 비극을 막고자 한다. 

    그러나 비극을 막기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은 꼬여만 가고 ‘비극의 총량’은 변하지 않은 채 그 대상만이 바뀔 뿐이다. 그리고 네 명의 삶은 각기 극단적으로 변하게 된다. 영화의 플롯은 불친절하게도 결과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어떤 원점에서 발생한 사소한 결정들이 가져오는 엄청난 변화를, 그 과정을 축약한 채 보여준다.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로만 제시된다. 

    이는 영화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과정을 생략하고 원인과 결과의 신들을 배치함으로써 미스터리구조에 관객을 가둔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나비효과이론(중국에서 일어난 나비의 날개 짓이 미국에서 토네이도가 된다. : 원래는 브라질에서 미국이나 영화에서는 이를 살짝 비틀고 있다. 이 역시 의도적인 배치다.)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과학적 근거로 제시하며 곧바로 인간의 삶에 접목시킨다. 물론 사람도 물리법칙 안에 사는 한 자연의 섭리로서 통계치를 따른다. 

    문제는 나비효과에서 말하는 ‘사소한 날개 짓’이란, 특정한 인자가 어떤 결과에 결정적으로 특출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인자들이 만들어낸 경우의 수만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 중에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이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게 되고 그것은 예측불허의 카오스로서 혼돈 상태이며 과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수학적 통계를 통해 그 방향만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화는 모든 결과들의 원인을 어떤 특정 사건 특정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다. 물론 영화적 장치이며 내러티브가 구현하는 우연성은 일종의 환유장치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지적함이 아니다. 거기엔 ‘이데올로기’로서 일종의 ‘중심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영화의 결말부,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나 자신을 존재 이전으로 돌림으로써 비극을 막는다. 그러나 이는 ‘희생제의’라는 신화의 세계에 우리를 가두고자 함이다.

    사실 나비효과가 개봉된 시점은 2004년, 미국 내에서 네오콘(neo-conservative) 세력이 득세하고, 신자유주의가 정점에 다다른 시기이며, 미국 중심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에 제동을 걸 세력은 없어 보이던 때다. 영화는 마치 ‘변화를 꿈꾸는 자, 멈출지어다.’ 라는 명령과도같이 작동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운명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자괴감과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숨겨진 상징체계를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경쟁을 내면화하고 체제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일종의 ‘효과’를 창출한다.

    멀리 미국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의 중심은 ‘나’ 자신임에 분명하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나의 성공’이 온전히 나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세속적 의미에서 성공한 삶이란, 우연과 우연의 불확실성 속에서 다시 몇 번이고 우연을 거듭한 끝에 잠시 부와 명예를 거머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성공이 나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서만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어떤 이도 그가 가진 재화를 가지고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카오스이론에서 나비효과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만들어낸 소소하지만 대기에 깃든 수많은 주름과 주름들의 상호작용이 모여 파고를 이루고 마침내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과관계(因果關係)로서 원인과 결과라는 단순한 산술구조는, 2개항을 넘어서 3개항만 되어도 적용 불가능해지고 관측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인간관계(人間關係라)는 ‘복잡계’에서 나의 잘남만을 뽐낼 수 없다. ‘나’라는 자아에게 세상의 모든 ‘나’는 ‘우리’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 성찰할 때가 아닌가 싶다. 국가건 개인이건, 차원을 막론하고 코로나사태로 더욱 우리가 매개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시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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