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발칸 반도의 유랑민족 롬족(집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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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발칸 반도의 유랑민족 롬족(집시) 이야기
  • 객원기자
  • 승인 2020.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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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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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기자가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기자는 테살로니키에 체류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마냥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건축 예술의 정점인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와 로톤다를 지나쳐 갈레리우스 광장으로 왔다.

로마 제국 말기 갈레리우스 황제 때 세워진 개선문이 눈에 띄는 이곳은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와 더불어 테살로니키 관광의 주요 기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사내가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떠올리는 걸인들과 달리 이 사내는 왠지 모르게 건강하고 쾌활해 보였다. 몇몇은 그냥 고개를 젖히며 지나치기도 했고(그리스에서 고개를 위로 살짝 젖히는 것은 '노'를 뜻하는 제스쳐다) 어떤 이들은 간단한 축복 인사와 더불어 주화 몇 푼을 건넸다.

갈레리우스 광장을 지나쳐 에게 해에 근접한 산책로에 이르자 거리의 악사들이 보였다. 이들은 처음보는 현악기와 관악기로 민요풍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발칸 지역 민속음악 및 현대음악에 문외한이었던 기자는 순전히 중동풍 내지는 동유럽 지역 민요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그리스인 지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방금 언급한 그 걸인 사내와 거리 악사들이 '집시'로 널리 알려진 유랑민족 롬족의 일원임을 알게 됐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사진=연합뉴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사진=연합뉴스)

롬족의 기원은 대략 12세기경 발칸 지역으로 이주한 북인도계 유랑민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이 유럽의 사서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14세기경에 그리스 크레타 섬을 방문한 한 로마 가톨릭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의 기록에서다. 그는 이들 롬족을 '카인의 후예'로 지칭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카인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동생 아벨을 질투해 살인함으로써 창조주 야훼의 진노를 사 쫓겨난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부터 서구인들이 문화적, 인종적 타자로써 롬족을 차별적 시선으로 바라봤음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와 같은 기록을 남긴 수사의 출신성분인 아일랜드인들 역시 영국을 비롯한 앵글로색슨 문화권 내에서 오랫동안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됐다) 이 기록이 증명하듯, 롬족은 유럽 내에서 역사적으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돼 왔다.

특히나 그 악명높은 나치 독일은 롬족들을 ‘우수한 아리안 민족 국가’의 적으로 간주해 점령지에서 롬족들(수십만에서 최대 150만여명으로 추산)을 대량학살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전후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독일을 비롯한 몇몇 서유럽 국가들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롬족 여성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가하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사진=영화 '집시의 시간' 캡쳐)
(사진=영화 '집시의 시간' 캡쳐)

그럼에도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노래와 춤을 통해 현대 유럽 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발칸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록 뮤지션이자 세계적인 현대음악가로 손꼽히는 고란 브레고비치는 롬족들의 민요와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 역시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세르비아 영화 감독인 에미르 쿠스트리차는 롬족들의 문화와 애환을 자신의 작품들에 반영시키기도 했다.

현대 한국인 여행객 입장에서는 유럽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는 이들 롬족의 모습이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경우에 따라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거쳐온 애환과 고난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발휘된 예술적 영감은 단순한 근대적 잣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낯설음'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용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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