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깨금, 풀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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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깨금, 풀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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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22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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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집에서 풀을 하는 날은 종일 신났다.

풀을 한다는 건 농사지을 때 요긴하게 쓸 퇴비를 한다는 것이다. 갈풀한다고도 하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보통 풀을 한다고 불렀다. 보통 음력 7월경에 풀을 하는데 워낙 일의 덩치가 커서 여러 집이 어울러서 품앗이 형식으로 서로 날을 정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풀을 했다. 요즘은 산과 들, 개울가에 풀이 넘쳐나지만 당시에는 몹시 귀했던 터라 서로 먼저 풀하는 날을 잡으려고 신경을 꽤나 썼다. 날을 먼저 잡으면 집과 가까운 곳에서 더 좋은 풀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멀리 있는 산에 가서 거친 풀을(어린 나무들까지) 해야만 했기에 날을 정하다 간혹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었다. 한 해만 풀을 하는 게 아니라 매해 해야 하기에 보통은 순번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데 핑계를 대고 억지를 쓰는 집도 있어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하여튼 간에 여름이 되면 농사를 짓는 산골마을의 장정들은 한데 모여 어김없이 지게를 지고 풀을 하러 산으로 갔다.

다른 지역은 하루에 한 사람이 일곱 짐의 풀을 했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은 그렇지 않았다. 오전에 두 짐, 오후에 두 짐, 모두 네 짐을 했다. 또 풀하는 조와 풀 써는 조를 나눴다는데 우리 마을은 폴을 모두 한 뒤에 다 같이 풀을 썰었다.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우리 집 마당에서 두 대나 세 대의 작두로 풀을 써는 모습을 나도 꽤 여러 번 보았는데 마치 잔칫집처럼 흥겨웠다. 풀아시(풀을 작두에 밀어 넣는 사람)가 엮어내는 선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렸다. 풀아시가 풀을 넣으며 소리를 하면 작두꾼은 들어 올린 작두에 올려놓은 발을 힘차게 내리밟았다. 강원도 태백에서 채록된 풀아시의 선소리를 옮기면 이렇다.

우러리다, 우러리!
양지쪽에 노랑 싱거리다!(억센 나무가 들어갈 때)
우물할미 속꾸뱅이다! 무진타리 들어간다!(무른 풀이 들어갈 때)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찬 선소리는 흥과 힘을 돋게 할 목적도 있지만 실상은 작두에 들어가는 풀의 성질을 작두꾼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무른 풀이 들어갈 땐 힘을 약하게 쓰고 억센 나무가 들어갈 땐 단단히 준비하라는 뜻이다. 즉 힘의 낭비를 막으며 풀을 썰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정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풀아시, 작두꾼, 풀모시(풀아시에게 적당한 양의 풀을 대주는 사람)를 했다. 어린 시절 나도 우리 마을 어른들의 풀 써는 모습을 지켜보며 선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른들이 잠시 막걸리를 마시며 쉬는 틈을 이용해 나도 한번 해보려고 작두의 발판에 발을 올려놓고 밧줄을 잡아당겨 작두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겨우 반쯤 올린 게 전부였다. 보통 작두꾼은 왼손은 지게작대기, 오른손은 작두의 발판과 연결한 밧줄을 잡는다. 왼발은 작두의 높이와 맞춘 디딤판에, 오른발은 작두의 발판에 올려놓는 게 기본자세다. 작두를 들 땐 지게작대기와 밧줄에 힘을 주었다가 풀을 썰 땐 발판에 올려놓은 오른발에 온 체중을 다 실어서 밟았다. 그건 어린아이가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풀아시를 할 수도 없었는데 숯돌에 갈아 날카로운 작둣날에 까딱하면 손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해서 당시 내가 했던 일은 깍쟁이나 쇠스랑, 거릿대로 썰어놓은 풀을 끌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풀을 하는 날은 남정네들만 바쁘고 힘든 게 아니라 엄마들도 종일 바빴다. 풀하러 온, 열 명 가량의 남정네들을 해먹여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 젠놀이(새참), 점심, 오후 젠놀이를 술과 함께 기본적으로 준비했다. 풀 써는 일이 늦게 끝나면 저녁까지 풀밥을 먹여야 하니 혼자 하기엔 벅차서 다른 집 아주머니도 왔다. 신나는 건 우리들이었다. 무쇠솥에서 밥(그것도 쌀밥!)을 모두 푸고 나면 솥바닥에 눌러 붙은 소꼴기(누룽지)는 우리들 차지였다. 당원을 살짝 뿌린 소꼴기 맛은 맛있는 과자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쌀밥으로 만든 소꼴기라니! 그런 소꼴기는 일 년에 서너 번밖에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엄마가 정지에 쪼그려 앉아 하루 세 번 설거지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려도 어린 나는 소꼴기를 씹으며 풀냄새가 가득한 마당의 풀 더미를 뒤져 깨금(개암)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산 저 산 서너 명씩 흩어져 풀을 하는 일꾼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풀을 지게에 지고 돌아왔다. 풀을 할 때는 더 많은 풀을 지기 위해 지게에 바소구리(발채)를 얹지 않았다. 지게 하나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짐을 질 수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른들은 지게만 지면 모두 장사로 변하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여름의 풀은 성장을 하느라 물을 잔뜩 먹고 있어 다른 계절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러니 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집주인이 힘이 약하거나 지게질을 잘 못하면 풀을 사서 퇴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남정네들이 힘이 없으면 경험하는 비애였다. 힘이 좋고 풀을 잘 베는 사람은 먼저 한 지게를 가득 채운 뒤 쉴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다. 일찍 자기 지게를 채우면 옆 사람을 도와주었다. 그게 시골의 인심이었다. 서로 도우며 같이 사는 게 바로 농촌의 삶이었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가난한 시절을 그렇게 건너왔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갔다.

풀은 보통 풀의 양이나 사람 수에 따라 발작두 두 개나 세 개로 썰었다. 그러니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 작둣날에 잘려나간 풀에서 풍기는 냄새가 마당에 가득했다. 작두로 썬 풀은 한데 모아 마당 귀퉁이에 둥근 풀가리를 쌓았다. 풀가리는 다 쌓으면 어른들 키보다 훨씬 높았는데 그걸 쌓는 것도 기술이 필요했다. 잘못 쌓으면 무너질 수 있었기에 어른들은 서로 말씨름을 해가며 어떻게 하면 더 견고하게 쌓을 수 있을까를 의논했다. 마당을 가득 채웠던 풀이 싸이로(silo) 같은 둥근 풀가리로 모두 옮겨지면 마침내 일이 끝난다. 남정네들은 어둑어둑해지는 마당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신 뒤 지게에 작두를 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풀가리를 바라보며 어금니나 돌맹이로 깨금을 깨서 알맹이를 꺼내 먹었다. 잣보다 크고 도토리보다 조금 작은 깨금 알맹이는 무척 고소했다. 소쿠리에는 내가 풀 더미에서 딴 깨금이 가득했다.

언젠가 아버지는 말하셨다.

“그 시절은 비료가 귀했던 터라 비료 한 되나 두 되가 생기면 약처럼 썼어.”

풀가리의 풀은 마구(외양간)로 매일 조금씩 들어가 소가 깔고 자는 담요가 되었다가 소의 배설물과 섞여 얼마 뒤 두엄더미(퇴비장)로 이동한다. 두엄더미엔 뒷간(변소)에서 나온 인분도 섞인다. 그렇게 가을 겨울을 나는 동안 썩고 발효의 과정을 거쳐 봄날에 농사지을 밭으로 퇴비가 되어 나가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퇴비생산이 한창이던 시절이어서 우리들의 여름방학 숙제에도 퇴비 해오기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사내아이들은 개학날 자전거에 퇴비를 싣고 학교에 갔고 여자아이들은 아버지나 오빠가 지게나 리어카로 퇴비를 날라주는 진풍경이 신작로에서 벌어졌다. 아마 내가 중학교 때까지 퇴비 숙제가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봐도 참 어이없는 여름방학 숙제였다.

이제 농부들은 옛날처럼 풀을 하지 않는다. 퇴비를 대체할 비료나 계분을 돈을 주고 구입해서 쓴다. 시골의 산과 들 물가엔 베지 않은 풀이 가을까지 가득하다. 당연히 퇴비를 해야 하는 방학숙제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아주 가끔 어금니로 깨금의 껍질을 깨던 그 소리만 환청처럼 들려올 뿐이다.

풀하는 날, 그리고 깨금, 참 아름다운 기억을 불러오는 낱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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