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장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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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장미의 이름

    • 입력 2020.07.20 09:29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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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영화 ‘장미의 이름’은 잘 알려진 대로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코 에코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의 명성에 편승한 감이 없지 않지만,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역시 잘 구성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서 딱히 그 배경을 알지 못해도 중세 판 셜록 홈스를 보는 듯, 긴장감과 흥미가 돋보인다. 

    그런데 제목과는 달리 장미와 그 이름 그리고 의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영화에서는 아예 드러나지 않고(다만 장미가 아련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뉘앙스로 바쳐질 요소가 있다. 이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해석이 더해진 각색이다.) 다만 소설에서는 마지막에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고 끝을 맺는다. 

    이는 텍스트가 만들어진 이후, 철저히 그 텍스트에 생명을 넣어주는 주체가 관객에게 있음을 상기하게 하는 일종의 장치이다. 장미를 덧없는 권력으로도 혹은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의 기억으로도 그 외 어떤 것으로도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연장선상에서 작품의 역사적 배경 혹은 철학적 논증 등 작품에 녹아있는 다양한 모티브로서 제노텍스트(생성텍스트)들에 대한 선행학습이 되어있는 경우엔, 온라인게임에서 어렵사리 획득한 고가의 아이템으로 상황을 ‘클리어’한 것과 같은 ‘텍스트의 즐거움’이 넘치는 작품이다. 

    원작자 에코는 방대한 소설의 프롤로그에 자신의 글을 ‘원전 없는 모방’의 형식을 취한다고 쓰고 있다. 이는 이야기 속의 대사나 액자구조형식의 화자의 내레이션에 성경이나 혹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나 말, 철학적 텍스트가 원용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편의 완벽한 짜깁기가 이루어진 셈이다.

    위와 같은 방식은 진즉에 문예이론가 발터 베야민이 시도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논리와 주장을 드러내기보다 서평문의 형식에 숨기고, 모든 텍스트는 인용의 인용이라는 상호텍스트성에 기초한 ‘비체계적 글쓰기’이라는 모순적 방법론을 구사하였다. 이로써 그가 추구한 ‘진실은 구체적이다’라는 명제를 문자 그대로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말하자면 에코의 텍스트는 이러한 방법론을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잘 짜인 구조에 녹여낸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부연하자면 에코가 평생을 두고 연구한 다양한 학문과 주장, 종교 혹은 철학적 논증 그리고 기호학적 방법론 등을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생각, 사유와 유추라는 이성적 행위 혹은 감성상태, 윤리관등에 녹아내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텍스트를 접하는 이들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재구성되는 효과를 가져 오게 된다. 

    우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327년 11월로 설정되어 있다. 제국의 권력에 밀려 교황이 거처를 로마에서 프랑스로 옮긴 70년간의 ‘아비뇽의 유수’ 기간 중에서도 권력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때이다. 교황 요한 22세는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자 바닥으로 떨어진 교황의 권위를 황제의 우위로 복귀하고자한다. 교황파(구엘프)와 황제파(기벨린)가 권력투쟁을 벌인 ‘중세의 가을’ 쯤 되는 시점이다. 

    이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호이징가가 동명의 책에서 주장한 표현이기도 한데, 한 시대의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그 시대의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14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시기, 역사적으로 르네상스가 움트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중세라는 거대한 흐름의 막바지, 그 기세가 극에 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시대가 멸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는 시기에 보수적 권력은 그것을 지키려고 더욱 흉포해진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 역시 그만큼 도전적이고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베네딕트수도원(이 수도원 소속의 수도사들은 양대 권력사이를 오가며 균형자를 자청했다.)에서,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눠진 두 집단이 만나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이른바 교회의 청빈을 두고 벌인 이단논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문제로 첨예할 수밖에 없다. 제국의 후원을 받는 프란체스코수도원 소속의 수도사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목자들은 청빈해야하며 교회는 모든 부를 세속에 나눠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수용하기 어려운 교회권력은 이교도로부터 가톨릭을 지키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고 전파하는데 필수불가결하다는 논리로 맞선다. 

    위와 같은 논란은 단순한 교리의 해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이동을 막고 보수권력의 중흥을 도모하는가 아니면 구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역사의 변곡점을 찍는가의 문제로 확대된다. 그러나 잠시 권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이던 교회권력은 중세이전의 상태, 즉 인본주의로 무장된 그리스로마의 정신으로 되돌리려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첨예한 대립이 있었던 시기에 많은 이들이 이단으로 몰려 희생되었다. 그리고 마녀사냥이라는 혐오의 정치가 극에 달했던 때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동일한 시기 유럽의 중세는 페스트라는 거대한 역병의 역습을 맞게 되면서 그 붕괴의 속도는 급격한 그래프를 그리게 된다. 근세가 출현하기 전 중세의 가을은 숙명처럼 징후적인 사건들로 넘쳐났다.

    이쯤에서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수도원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때마침 이곳을 방문한 주인공 윌리엄수도사(숀 코네리 분)와 그의 조수 아드조(극중 서사의 내부화자이기도 하다)는 수도원장으로부터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으로 의심되는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단 7일간에 벌어지는 사건은 공교롭게도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징후들과 유사했고 사람들은 불안에 떨게 된다. 황제파에 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교회가 더욱 청빈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교황파의 이단 심문관인 베르나르도 귀(실존인물로서 도미니크회의 주교)는 이와 같은 상황을 역이용해 수도원에 먹을 것을 구하러 잠입한 처녀를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하고, 그녀를 변호하는 윌리엄 역시 이단으로 몰아 위기에 빠트리고자 한다.

    그러나 일련의 살인사건의 실체는 두 그룹의 주장과는 달리 수도원 깊은 곳, 미로 속에 숨겨진 장서관에서 은밀하게 벌어진 일이다. 윌리엄은 호르헤라는 수도사가 어떤 장서 한권을 세상에 나오지 않게 하고자 살인도 서슴지 않고 벌이면서 발생한 사건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편이다. 

    ‘희극론’은 세상에 없는 책이다. 아니 어쩌면 극중 설정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썼지만 전해지지 않은,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한 책이다. 이 책 한권을 두고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의 미스터리의 전말은 수도원소속의 노쇠한 눈먼 수도사 호르헤가 세상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이 추구하는 웃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꾸민 일들이다. 중세적 가치로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웃음은 원죄 이후 애초부터 사라져야할 감정이다.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상대를 이단시하는 모든 논쟁은 모두 권력투쟁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많은 희생제의와 비극이 탄생한다. 비극을 긍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삶이 고단한 이들에게 정화(카타르시스)를 통해 그래도 살만하다는 착시를 가져다주는 효과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정치행위’가 되어왔다. 그러나 모든 전쟁과 폭력이 여기로부터 연유되었으며, 일상의 차별 또한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면죄부를 파는 교황파의 악행도 청빈을 내세워 묵시록적 내세관을 내면화하고자하는 황제파의 논리도 사실 희극 앞에선 무력해지는 허상이 된다. 사실 전자가 원죄라는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후자는 미래에 가치를 두고 현실을 옥죄었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기억과 물질의 소유라는 형태로 ‘지금여기’라는 존재의 가치를 역사적으로 금기시해왔다. 웃음을 부정함으로써 엄숙주의에 매몰되는 것을 당연시한 결과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장미의 이름은 다만 중세의 문제에 머물러있지 않다. 근세에도 아니 현재에도 그 주체와 대상을 바꿔가며 지속해 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만 하더라도 과학문명과 자본주의로 무장한 서구 권력은 그 세력의 정점에 와 있는지 모른다. 호이징가의 표현을 빌자면 현세가 아닌 ‘근세의 늦가을 쯤’이 되지 않을까싶다. 

    코로나19바이러스 팬데믹(대유행)은 흑사병과 유사하고, 국제시장에 횡행하는 자본권력의 수평이동을 막기 위한 모략과 계책은 ‘죽이기 아니면 죽기’ 식의 러시안룰렛이 논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인류가 그나마 고안해 낸 민주적 질서는 세계 곳곳에서 반동의 세력에 의해 유린되고 있고, 특정인물이나 집단이 그 권력독점을 고착화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나마 대안적 민주주의의 올바른 사례로서, 촛불혁명이라는 광장의 직접민주주의 형식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 국정농단을 바로잡은 일을 실천한 대한민국에서 조차 ‘엄숙주의’로 무장한 집단의 반격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모든 비극의 시작인 교조적 엄숙주의는 다수를 희생의 제물로 삼고 소수를 섬긴다. 엄숙주의는 곧 권위주의체제의 다름 아닌 바로 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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