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아버지와 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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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아버지와 지게

    • 입력 2020.07.08 04:45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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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지게가 있었다.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왔다.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개울가로 가서 소꼴을 베어가지고 왔다. 봄날 아버지는 두엄을 지게에 담아 밭으로 날랐다. 가을이면 그 지게에 옥수수나 감자를 가득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그뿐인가. 이사를 갈 때도 지게로 무거운 짐을 날랐고 장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골생활에서 지게는 한 마디로 아버지의 만능 운반수단이었다. 필요한 것은 무거운 짐을 얹은 지게를 질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지게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어쨌든 산골마을에서 농사일을 하는데 지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어느 집에 가도 지게는 요즘의 자가용처럼 처마 밑이나 담벼락에 세워져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본 아버지의 지게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날 산에서 나뭇단을 지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지게에는 굵은 고무딸기가 매달려 있었고 산판일을 끝마치고 귀가할 땐 커다란 건빵 포대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짐을 지게에 지는 사람이었다. 동네사람들이 그 얘길 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더 어렸을 적에는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려 아버지의 지겟가지에 올라탄 채 새뿔(지게의 좁아진 맨 윗부분)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는데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홀했다.

    지게는 디딜방아와 함께 우리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농기구)의 하나라고 한다. 지게를 지고 못 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좁은 산길, 험한 고갯길, 논둑 밭둑길, 외나무다리, 돌다리, 심지어는 지게를 지고 개울을 건너갈 수도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과 딱 맞는 농기구이자 운송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우수함 때문에 다른 나라처럼 마차 제조의 기술개발이나 길을 넓히는 일이 한참이나 뒤처졌다고 하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는 지게를 직접 만들었다. 사용하던 지게가 너무 낡았거나 지겟다리(목발), 지겟가지가 부러져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하면 산에 올라가 지게의 몸체가 될 소나무 가지를 물색했다. 몸체는 y자 형태라고 보면 되는데 두 개가 필요하다. 가급적 쌍둥이처럼 닮은 게 좋다. 그렇게 베어온 몸체를 잘 말린 다음 낫과 자귀를 사용해 적당한 굵기로 다듬고 체구에 맞게 길이를 조절한다. 그 다음엔 몸체와 몸체를 연결할 세장(단단한 박달나무나 물푸레나무)을 깎고 몸체의 안쪽 옆면에 구멍을 뚫어 끼워 맞춘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길이가 길어지는 세장은 3~5개 정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몸체와 세장이 빠지지 않도록 탱개(탕개줄)를 감은 뒤 풀리지 않도록 탱개꼬쟁이(탕개목)를 질러놓으면 일단 지게의 기본 형태가 완성된다.
     
    다음은 지게에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짚과 동아줄로 걸빵(메삐, 밀삐, 멜빵) 두 개를 만들어 위에서 두 번째 세장과 지겟다리에 연결한다. 걸빵은 지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났을 때 어깨에 닿는 부분이므로 가급적 두툼하게 만들어야 아프지 않으므로 헝겊으로 덧대면 좋다. 등태(지게에 등이 닿는 부분) 역시 짚으로 짜는데 통통하게 엮어야 등이 편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쪽 지겟다리에 동바를 연결하면 되는데 동바는 짐을 실었을 때 고정하기 위한 밧줄이어서 평상시에는 지겟가지에 둘둘 감아놓는다.
     
    아, 중요한 부속도구가 두 개 남았다. 첫 번째는 지게작대기(바지랑대)다. 지게는 어디에 기대놓지 않는 한 스스로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게작대기가 필요하다. 윗부분이 아귀가 진 지게작대기를 지게의 가장 위쪽 세장에 비스듬하게 게워놓은 채 짐을 싣고 지게를 지고 일어날 땐 그 지게작대기로 균형을 잡는다. 무거운 짐을 지었을 때, 길이 험할 때, 지고를 지고 가다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지게작대기는 다양한 용도를 발휘한다. 흥이 날 땐 지게작대기로 지겟다리를 두드려 박자를 맞춰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게를 진 사람이 기분이 안 좋을 때엔 그 지게작대기에 얻어맞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지게작대기에 맞아보지 않은 사람 인생을 논하지 말라!)

    두 번째 부속도구는 바소구리(발채)다. 바소구리는 지게에 소꼴이나 농작물 등을 실을 때 유용한 농기구다. 싸릿가지를 둥글넓적한 조개 모양으로 결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드는데 양쪽에 고리를 만들어 하나는 지겟가지에 걸고 나머지는 새뿔(새고자리)에 걸어서 사용한다. 필요할 때만 부착했다가 떼어낼 수 있는데 대단히 요긴한 농기구다.

    어두워져가는 가을 오후 산 아래 강냉이밭에서 마른 강냉이를 따던 아버지는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집에 가서 지게에 바소구리를 걸어서 가져오라고. 한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지게를 짊어지다가 바소구리를 떠올렸지만 순간 멍해졌다. 바소구리란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바소구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바소구리? 바소구리? 중얼거리며 헛간을 뒤지고 앞마당과 된(뒤란)을 오갔지만 끝내 바소구리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빈 지게만 지고 비알밭으로 갔으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상상에 맡기겠다. 빈 지게를 진 나는 훌쩍거리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공부하는 국어책에는 바소구리란 말이 없다고 툴툴거리며.

    사실 아버지의 지게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무거웠다. 마을의 어떤 아이는 자기 몸에 딱 맞는 지게를 가지고 있어 나도 아버지에게 내 지게를 만들어달라고 했으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지게를 질 수는 있었으나 짐이 무거우면 지고 일어나거나 걷는 게 쉽지 않았다. 지게작대기를 짚고 일어나다가 얼찐하면(툭하면) 지게와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지거나 앞으로 넹게배겼다(넘어졌다). 지게가 내 체형과 맞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지게를 지는 요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케 일어난다 해도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지겟가지에 올려놓은 짐을 쏟아버렸다.

    지게 지는 요령을 아버지에게 배우면서 나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지게작대기로 게워놓은 지게를 질 땐 먼저 지게 앞에 앉아 걸빵을 양 어깨에 걸쳐야 한다. 등을 등태에 바짝 붙인 뒤 왼쪽 고뱅이(무릎)는 땅에 붙이고 오른쪽 다리는 기역자로 구부린 채 오른손으로 지게작대기를 단단하게 잡는다. 그 다음엔 등으로 지게를 무게를 어느 정도 지탱하며 세장에 게워놓은 지게작대기를 오른손으로 천천히 빼서 힘의 균형을 맞추며 왼쪽 무릎과 오른쪽 다리를 조금씩 일으켜 세운다. 이렇게 하면 무거운 짐을 올려놓은 지게를 지고 일어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구부린 등과 지게작대기로 지게의 무게를 섬세하게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등에 진 지게를 벗는 일, 땅에 내려놓는 일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지게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닌 것이다.

    이제 늙으신 아버지는 지게를 지지 않는다. 대신 경운기를 끌고 다닌다. 경운기 이전에 리어카가 있었다. 눈이 덮인 겨울엔 발구를 끌고 가서 나무를 했다. 가끔 고향에 가는데 어느 누구도 지게를 지고 다니지 않는다. 경운기도 쉽게 보기 어렵다. 자그마한 농용트럭이 모든 걸 해결한다. 아버지는 농용트럭까지는 가지 않았다.

    한때 나는 인간에게 어깨가 있는 게 원망스러웠다. 지게는 어깨가 있어야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이 되면 절대 어깨를 쓰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하지만 이제 지게는 고향집에서 영영 사라졌다. 아버지에게 지게작대기로 얻어맞는 일도 없어진 것이다. 그 시절 도망치지 않고 지게작대기에 조금 더 맞았다면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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