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쓰는 산문] 오래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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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쓰는 산문] 오래된 친구

    • 입력 2020.07.03 06:45
    • 수정 2020.07.09 13:19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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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아 시인·수필가
    이향아 시인·수필가

    오래된 친구는 늘 신던 신발처럼 편하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내 옆에 있다. 

    나는 오래된 친구의 음성을 알고, 아무렇게나 내둘러 쓴 그의 글씨를 읽을 수 있으며, 여러 사람의 발소리 중에서도 그의 것을 구별할 수 있다.

    나는 내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의 제목과 꽃 이름과 그 유래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그가 선택할 만한 소지품의 색깔과 모양, 좋아하는 이성의 프로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내가 친구 앞에서 갑자기 마음이 동하여 별로 깊은 생각도 없이 이상한 일을 저질렀을 때도, 친구는 놀라거나 의심하지 않고 이해할 것이다. '너 왜 그러니?, 미쳤니?' 나무라지 않음은 물론, 이유를 따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나보다도 먼저 알고 나보다도 먼저 느끼며 나보다 먼저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되어서 서로의 버릇을 안다. 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는지, 염치없고 쑥스러워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 아무 말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의 심중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내가 오래된 친구 앞에서 아무 짓이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내 오랜 친구에게만은 멋지게 보이고 싶고 의젓하게 보이고 싶다. 우리 사이에 우정이 소중하듯이 우리 사이의 신뢰와 예절 또한 소중한 것이니까. 우리 사이의 흘러간 시간과 추억이 아름답듯이 우리 사이로 다가오는 내일의 약속 또한 존귀한 것이니까. 나는 내 친구에게만은 허술한 내 바닥까지 들키고 싶지 않다. 그가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나는 내 마음을 그렇게 다진다. 

    오래된 친구가 있지만 나는 또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산다. 새로 만나는 사람 중에도 놀랄 만한 향기를 지닌 사람이 있다. 오늘 만난 친구의 그 향기도 하루 이틀에 고인 것은 아닐 것이다. 반생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키가 자라고 뼈가 굵어지듯이, 인격으로 정착된 향기겠거니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오래된 친구를 사랑하듯이, 새로운 친구에게서 풍기는 향내를 반갑게 맞이한다. 내게도 향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우리가 지금 만났어도 친해질 수 있을까요?" 그가 내게 묻는다.
    "그럼요. 우리가 지금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남이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그는 조용히 말한다.

    운명! 그 친구의 음성에 실린 운명이라는 말에 내 맥박이 빨라지는 것 같다. 그렇기는 하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을 모두 만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불가에서는 서로 옷자락 한 번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고 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미 내 친구가 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섭섭하지 않게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 만한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없다.

    혹시 새로 만난 친구의 향내에 도취해서, 이미 내 육신처럼 익숙해져 버린 오래된 친구에게 무심해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쓸쓸한 일이겠는가? 오래된 친구에게서 향내를 맡을 수가 없다면 그것은 향내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미 오래전에 그 향내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 젖어 있어서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래 곰삭아 스며든 우정처럼 편안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은 없다. 우리가 마주 앉아 오래 묵어 향기로운 술을 천천히 음미하는 저녁은 아무런 말이 없이 시간이 흐를지라도 참으로 호화롭고 윤택한 밤이 깊어갈 것이다. 눈만 마주쳐도 감정이 통하고 걸음걸이만 보아도 진심을 읽을 수 있는, 오래 사귄 친구가 몇 사람 곁에 있다면 세상의 어떤 보배를 가진 것보다 넉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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