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달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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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달그장

    • 입력 2020.07.01 06:45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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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엄마, 뽀빠이 사먹게 돈 좀 줘?”
    “금방 점심 먹었는데 과자는 무슨 과자야!”
    “아, 이십 원만 줘!”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나가서 뽕오디나 따먹어!”

    아무리 애원을 해도 엄마는 십 원 한 푼도 주지 않고 밭으로 가버렸고 나는 집이나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는 남의 집 일을 가셨고 형과 누나들은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심심하기 이를 데 없는 오후였다. 건넛마을로 놀러가고 싶었지만 신작로 옆 송방(가겟방)을 지나쳐야 했다. 과자 생각이 간절했기에 화만 날 게 틀림없었다. 사실 과자는 밥보다 맛있었다. 꿀떡보다도 달콤했다. 하루 세끼를 과자만 먹고 살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송방의 막내아들이 아니었다. 엄마를 졸라 가끔 돈을 타내고 그 돈으로 과자를 사먹어야만 하는 처지였다.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와 구구단을 외우려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뽀빠이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 윗방과 안방을 차례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형과 누나들의 책상빼다지(서랍)와 벽에 걸어놓은 옷의 주머니를 탐정이 증거물을 찾듯 수색해 나갔다. 설마 이십 원이 없겠는가 생각하며. 안방도 마찬가지였다. 안 입는 옷을 넣어둔 귀(궤)와 시렁 위 보자기로 싸놓은 겨울 이불 사이로 손을 넣었다. 엄마는 그런 곳에 돈을 숨겨놓곤 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큰돈이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며 심지어는 장판 아래까지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정지로 나갔다. 엄마는 어디에 돈을 숨겨놓았을까 상상하며 어두컴컴한 정지를 둘러보았다. 먼저 찬장 앞으로 다가가 미닫이 유리문을 열었다. 포개놓은, 크고 작은 빈 그릇을 하나씩 꺼내 안을 살폈다. 밥그릇, 국그릇, 냄비, 숟가락 통, 양념 통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지만 후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일 원짜리나 오 원짜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엄마는 우리들이 학교에 갈 때 정지에서 돈을 꺼내주곤 했는데… 가느다란 싸릿가지를 찬장 아래에 넣어 쑤석거렸지만 허사였다. 

    대체 엄마는 어디에 돈을 숨겨놓았을까? 이제 남은 곳은 정지와 붙어 있는 광뿐이었다. 광에는 곡물을 넣어둔 단지들과 자루들이 있는 곳이었다. 단지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옥수수, 각종 콩, 팥, 좁쌀 등등이 들어있는 단지 안에 팔을 넣어 이리저리 휘저었으나 역시 기대했던 돈은 찾을 수 없었다. 벽에 박아놓은 못에 걸려 있는 자루들도 마찬가지였다. 쳇바퀴 안에도 없었고 함지박 안에도 없었고 말린 나물을 담아놓은 소쿠리 안에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닷 발이나 내민 채 툴툴거리며 정지를 나왔다. 

    그늘이 내려 있는 흙마루의 호박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자니 왠지 서럽고 눈물이 솟았다. 뽀빠이 한 봉을 사 먹을 돈 이십 원이 없다니. 결국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삽사리가 꼬리를 흔들었고 마구(외양간)의 암소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이내 모습을 감췄다. 뒷산에서 뻐꾸기만 가끔 우는 무료한 오후였다.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고 뽀빠이는 아직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매일 버스를 타고 중학교에 가는 형 때문에 엄마는 분명 어딘가에 돈을 숨겨놓았을 텐데 내 재주로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으니 서럽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 서러움에 겨워 눈물과 콧물을 훌쩍거리고 있을 때 마당 귀퉁이의 달그장에서 암탉이 꼬꼬댁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암탉이 둥지에서 알을 낳고 자랑을 하느라 우는 것이었다. 눈물에 젖어 있던 내 눈이 번쩍 떠졌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고 닭장으로 달려갔다. 

    어린 시절 내가 집에서 배웠던 말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표준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강원도 사투리를 쓰지 말고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표준어를 써야지만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말이 통한다고 알려줬다. 일본어에서 파생된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했기에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모어(母語)에서 멀어졌다. 받아쓰기 시간에 사투리나 일본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들은 친구들과 놀 때나 싸울 때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선생님은 강원도 밖으로 나갔을 때 촌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면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게 모어, 마음어, 사투리에 담긴 어떤 상상의 세계까지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부모의 말과 자식의 말이 미세하게 달라져 간다는 것이었다.

    한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 부모님은 횡계라는 지명을 홍계라고, 횡성을 홍성이라 발음을 했다. 나는 충남 홍성과 강원도 횡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홍성에는 고모가 살지 않았고 횡성에는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리하자면 닭장에 사는 닭은 왠지 서울 닭 같고 달그장이라 해야 비로소 강원도 닭, 어린 시절의 닭이 떠오른다 해야 할까. 물론 같은 닭이겠지만. 달그장 말고도 우리들은 병아리나 닭들을 달그새끼라 불렀다. 특히 닭이 부엌이나 방으로 몰래 들어와 잭패(사고)를 쳤을 때 “이놈의 달그새끼야!”라고 욕을 했다. 그러니까 닭은 달그, 달걀은 달그알, 닭똥은 달그똥이다. 

    닭은 달걀과 닭고기를 수시로 제공하니 가난한 산골사람들 입장에선 아주 유용한 가축 중 하나다. 밭을 가는 소가 아버지의 가축이라면 닭은 엄마의 가축이다. 달걀 하나로 많은 반찬을 만들 수가 있다. 가족들이 반찬투정을 하거나 귀한 손님이 오면 간편하게 닭을 잡는다. 소나 개, 돼지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달걀은 한데 모았다가 장날에 내다 팔 수도 있다. 때가 되면 알을 품어 병아리까지 부화하니 엄마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닭장이 없을 때엔 마구에서 소와 함께 키우기도 했다. 마구 뒤편에 횃대를 설치해 놓으면 닭들은 알아서 거기 올라가 잠든다. 소는 닭과의 동거를 싫어하지 않았다. 소 닭 보듯 한다는 속담은 거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닭들이 착한 것만은 아니다. 농사철이 끝나면 든내놓는데(풀어놓는데) 그때 정지나 방문을 잘 닫아놓지 않으면 귀신같이 알고 들어가 잭패를 부린다. 반찬그릇을 쏟아버리거나 방안에 그 냄새 나는 달그똥을 싸놓곤 한다. 닭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알을 품어 부화를 시킨 암탉이 병아리들의 엄마라는 것이다. 그 알들은 닭장의 모든 암탉들이 낳은 알임에도 불구하고. 닭똥 냄새는 지독하기 그지없어서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려다가 마당의 닭똥을 밟으면 기분이 이만저만 나쁜 게 아니다.

    그 봄날 오후 닭장으로 달려간 나는 암탉이 갓 낳은 알을 훔쳐 손바닥에 올려놓고 건넛마을의 송방을 향해 달려갔다. 갓 낳은 알의 따스함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가끔 엄마가 장에 가지 않고 송방에서 알을 판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알 하나가 이십 원이었다는 것도. 그렇다면 뽀빠이 한 봉과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좁은 언덕길을 달리고 또랑(도랑)을 뛰어넘고 널이 빠진 데가 많은 나무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넜다. 그게 다였다. 나무다리를 지나 제재소 마당을 지나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나만 넘어진 게 아니라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달그알도 흙바닥에 떨어져 터져버리고 말았다.

    서러운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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