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강냉이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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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도연의 강원도 마음어 사전] 강냉이밥

    • 입력 2020.06.23 06:50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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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대관령에서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사실 가난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끼니를 거를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우리 부모님도 농사가 생업이었다. 당시 대관령은 산간지역이라 주로 밭농사를 많이 지었지만 평지가 있는 곳은 모두 논이었다. 농산물 중에서 가장 귀하고 비싼 작물이 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알(비탈) 밭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논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신작로 옆에 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부자였다. 우리 집은 산자락에 붙은 비알 밭이 대부분이었고 도랑 옆에 손바닥만 한 논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쌀은 당연히 손바닥 한 옴큼이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던 산골사람들이었지만 교육열은 높았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 보냈다. 우리들은 책가방을 들고 신이 나서 학교란 곳으로 달려갔다. 당시엔 산골이라 해도 지금보다 훨씬 인구가 많아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로 초등학교 운동장은 가득 찼다. 학교는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산골짜기에서는 보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선생님, 교실, 책상과 걸상, 칠판, 백묵, 짝, 친구들, 교과서, 공책, 연필, 칼, 지우개, 책가방, 필통, 유리창, 마룻바닥, 교무실, 교장실, 서무실, 소사 아저씨…

    이런 새로운 문화에 접하느라 1학년들은 거의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바지에 오줌을 누기도 했고 집에 가겠다고 울며 떼를 썼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누런 콧물을 줄줄 흘렸다가 다시 삼키면서도 선생님이 목소리를 듣느라 열중했다. 

    그 학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던가.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한글을 배우고 덧셈과 뺄셈, 곱셈, 나누기를 배우느라 눈을 초롱초롱 밝혔다. 아, 음악 시간에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불렀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꼭 수업시간이 아니더라도 도처에 배울 것이 널려 있는 곳이 바로 학교였다. 그런데…학년이 올라가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나쁜 것도 차근차근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알게 모르게 서로를 비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시 학교라는 제도가 갖는 근본적인 모순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리들은 아끼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그 비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누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가. 공부를 잘하면 선생님과 부모님께 칭찬을 받는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몇 명은 나보다 더 잘했기에 기분이 편치 않았다. 누가 싸움을 잘하고 못하는가. 싸움을 하는 게 나쁘다고 해서 배우려하지는 않았지만 깡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은근 부러웠다. 여자아이들 중 누가 이쁜가. 그 아이 곁에 가면 괜히 두근거렸다. 누구 집이 잘 사는가. 학교에 입고 오는 옷, 신고 오는 신발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그 아이가 점심시간이면 책상 위에 꺼내놓는 보온밥통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쌀밥과 국, 소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식은 강냉이밥과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김치와 고추장이 반찬의 전부인 내 도시락 뚜껑을 여는 게 창피해 일부러 삼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서둘러 도시락을 비웠다. 자존심이 상해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 나가 홀로 공을 찼다. 반에서 혼자 보온밥통을 들고 다니는 그 아이는 부모님이 송방(가겟방)을 하고 있어 학교에 올 때면 늘 과자를 가지고 와 자기 마음에 드는 아이들(특히 이쁜 여자애들)에게만 주는 터라 기분이 몹시 나빴다. 그 기분을 풀 곳은 운동장밖에 없었다. 혼자 공을 차고 달려가 다시 그 공을 반대편으로 차는 일밖에 없었다. 공은 가끔 울타리를 넘어가 논바닥에 첨벙 빠지기도 했다.

    강냉이밥은 찰옥수수를 잘 말렸다가 맷돌에 타개서 지은 밥이다. 갓 지었을 때는 그나마 먹을 만하지만 식으면 영 아니었다. 꺼칠꺼칠한 게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다. 간사한 게 사람 입이라고 쌀밥이나 보리밥 또는 쌀과 보리를 섞은 혼합곡으로 지은 밥을 먹어본 뒤부터는 결코 먹고 싶지 않은 게 강냉이밥이었다. 점심시간에 책상 위에 꺼내놓는 것부터가 창피했다. 쌀밥은 아니더라도 나도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혼합곡으로 지은 밥을 도시락으로 싸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대신 감자를 섞어서 짓거나 반찬으로 계란후라이를 밥 위에 올려놓는 게 다였다. 생각 같아선 도시락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배가 고파 오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의혹이 샘솟기 시작했다. 아무리 손바닥만 한 논이라지만 그래도 매년 가을이면 우리 집 논에서도 쌀이 나오지 않는가. 엄마는 그 쌀은 대체 어떻게 했단 말인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지(벅)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엄마는 솥뚜껑을 열고 밥을 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뚜막에 걸터앉은 나는 둥근 솥에서 솟는 김이 사라지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강냉이밥 한가운데에 하얀 쌀밥이 한 줌 가량 들어 있는 것을! 아니…기억이 애매하다. 어쩌면 나는 엄마가 솥에 쌀을 안칠 때 보고 방에서 기다렸다가 밥을 풀 때 다시 정지로 가서 강냉이쌀 위에 얹어놓은 쌀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본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나는 보고 말았다. 그 쌀밥이 중학생인 형의 도시락에 고스란히 들어가는 것을. 누나들과 나의 도시락엔 단 한 알의 쌀도 들어가지 않고 맨 강냉이밥만 들어갔다는 참담한 현실을. 그 현실은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최소한 골고루 섞어서 네 개의 도시락에 들어가는 게 맞다고 나는 학교에서 배웠다. 이후의 상황은 뻔하다. 화가 난 나는 울고불고 집을 몇 바퀴나 돌면서 난리를 쳤고 그 결과 형은 자기 도시락을 내게 건네주곤 먼저 학교로 가버렸다.

    얼마 전 대관령 고향집에 갔다가 우연찮게 엄마와 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은 내 기억과 조금 달랐다. 형의 도시락에만 쌀밥을 담은 건 맞는데 당시 나는 초등학교에 가기 전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아마 그날이 형의 중학교 입학식 날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누구의 기억이 맞는 것일까. 아, 그보다 그때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대관령에선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불렀다. 딱딱하게 마른 강냉이를 타개서 지은 밥은 강냉이밥이고 그 강냉이를 튀긴 것은 강밥(튀밥)이라 했다. 강밥 튀기는 집은 강박집이다. 늦여름부터 나오는 알이 말랑말랑한 강냉이는 삶아 먹거나 구워 먹고 남은 것들은 말려서 팔거나 양식으로 썼다. 강냉이에는 찰강냉이와 메강냉이가 있다. 메강냉이는 보통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하여튼 강냉이밥이다. 도시락에 강냉이밥을 담아서 학교를 다녔던 아이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꿈을 꾼다. 맘에 두고 있는 이쁜 여자아이가 볼까봐 도시락뚜껑을 반쯤 덮은 채 강냉이밥을 먹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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