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엘비라 마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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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엘비라 마디간'

    • 입력 2020.06.22 14:58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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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배경으로 사용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으로 더욱 유명해 졌다. 1967년 빌보드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빌보드 역사상 클래식 음악이 랭킹에 오른 것은 그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이는 그만큼 당시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당대의 시대정신이 관통하고 있다.

    영화가 개봉된 시점은 전후 세대가 갓 스무 살을 넘던 시기였다. 그들의 마음속 깊이에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질서를 전복하고자 한 욕구가 응축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 서구의 젊은이들이 바란 세상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기보다 어떤 작위도 없는 무의의 상태를 꿈꿨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아나키즘적인 욕망이 발현된 것이다.

    이러한 욕망에는 20세기 전반 그들의 조부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가지 않겠다는 강한 항변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두 번에 걸친 참혹한 세계대전 이후 다시는 국가주의에 농락되어 헛된 희생을 더 이상 치를 수 없다는 각오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점차 치열해지는 전후 냉전체제에서 쿠바 핵위기와 베트남전쟁을 목도한 유럽의 젊은이들은 대오를 이뤄 어떤 구심점도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자신들이 전쟁에 징집되는 것이 아님에도 유럽의 청춘들은 미국의 또래 청년들이 벌이는 반전운동과 연대를 표방했다. 

    이쯤 되면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들은 '엘비라 마디간'이 무슨 반전영화인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멜로물이다. 그것도 불륜!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 출신 덴마크 장교는 서커스단에서 줄타기를 하는 소녀 엘비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시작은 도망쳐 나온 그들이 들판에 누워 한가롭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벌에 쏘이기도 하고 어린애들처럼 팔랑거리며 풀숲을 뛰어다니고 음식을 먹고 키스를 나눈다, 

    두 아이를 둔 유부남 식스틴과 아직 소녀티가 나는 엘비라의 밀월여행은 달콤하지만 불안하다. 그들을 쫓는 이들이 압박해 오고, 수중의 돈이 떨어져 숲 속에서 버섯을 따 연명한다. 식스틴이 일거리를 찾으려 해도 그의 풍모에서 드러나는 귀티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이 할 만한 일이 못 됩니다"라며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외줄타기 외에는 어떤 일도 못하는 엘비라는 궁여지책으로 공연이 가능한 작은 무대에서 춤을 추고 돈을 벌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극장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꼼짝없이 그들은 거리를 헤맨다. 그러다가 식스틴이 팔씨름 내기에서 이긴 약간의 돈으로 빵과 포도주를 산다. 그리고 농가에서 훔친 계란을 삶아 숲 속에서 마지막 만찬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 총을 쏘아 세상을 마감한다. 

    영화에는 별다른 극적 갈등도 없다. 굳이 찾자면, 식스틴의 군대 동료가 그들을 회유하며 엘비라에게 식스틴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죄의식을 각인시키는 장면, 그리고 엘비라가 무대에서 무릎 위를 보이고 춤을 추었다고 식스틴이 질투하는 장면 정도가 있으나, 이러한 갈등조차 그들은 이내 사랑함을 확인하는 일로 삼는다. 

    어떻게 보면 진부해 보이는 뻔한 스토리를 현재의 청춘들은 어떻게 이해할까 싶었다. 지루할 수 있는 내러티브 때문에 약간 산만하지 않을까 하며, 조심스럽게 튼 영화를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은 매우 몰입도 있게 보고 있었다. 도대체 50년도 더 된 영화가 왜 학생들에게 어필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영화는 멜로물을 취하고 있지만 철학적인 탐구가 필요한 작품이다. 영화 전편에 걸쳐 내내 흘러나오는 피아노협주곡 21번 역시 단순한 배경음악의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를 본 후 필자가 일정 시간을 할애해 모차르트의 음악과 그의 생애에 대해 소개하고 나서, 다시 토론을 시작하면 학생들은 묘하게 영화의 스토리가 모차르트의 삶과 닮아 있음을 캐치하고 약간 흥분된 어조로 세미나에 임한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모차르트의 삶은 네 개의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우선 6살 이후로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누나 나넬과 떠난 십 년간의 연주여행 시기다. 신동의 출현은 당시 유럽의 귀족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후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교회에 예속된 7년의 세월은 모차르트에겐 끔찍한 구속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빈에서 활동하던 십여 년의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의 열정을 불태운 시기였다. 그 후 말년 그는 교향곡, 음악극 마술피리, 클라리넷 협주곡, 레퀴엠 등 명작을 남기고 극도로 궁핍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극의 배경음악이 되는 피아노협주곡 21번은 1785년 그러니까 빈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에 작곡한 작품이다. 일련의 피아노협주곡을 만들어 사교계에 좋은 평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콘스탄체와의 결혼으로 아버지와 소원해진 시기이기도 한데, 이 작품을 발표하며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로부터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돈을 많이 벌었으나 크나큰 씀씀이로 가난의 그림자가 엄습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엘비라는 모차르트의 유년시절에 대한 은유이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궁정과 귀족들이 사는 성을 전전하며 연주활동을 시작한 어린 모차르트의 일상은 서커스나 다름이 없다. 피아노 건반과 바이올린 현 위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신동과 외줄타기로 명성을 얻은 실제인물 엘비라 마디간은 그렇게 중첩한다. 

    식스틴과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음에도 머무르던 호텔마당의 빨랫줄을 걷어 숲속에서 남몰래 줄을 타던 엘비라, 작곡으로 생계를 이어간 고전주의 전형의 천재, 왕족과 귀족 앞에서도 그 영혼은 음악의 선율위에서 늘 놀이를 즐기던 근대적 예술가의 탄생과 극중 캐릭터 엘비라가 닮아 있는 지점이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식스틴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 바 진다. 극 중 군대의 규율과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한 그는 모차르트가 벗어나고자 했던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교조적 분위기와 닮아 있다. 결국 모차르트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난다. 자유주의적 서구 시민사회가 태동하고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시기 모차르트는 혁명을 말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가치를 온몸으로 실현했던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자연의 조화와 이치를 머릿속 악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천재 모차르트에겐 궁정과 귀족의 규율이란 한낱 작위적인 것들에 불과했을 것 같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선보인 그의 웃음소리는 절대왕정과 같은 구태의 질서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없다. 

    극 중 엘비라와 식스틴의 결합은 모든 속박과 제도적 가치에서 벗어난 예술가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들이 합일된 상태가 된 장면에서 여지없이 모차르트협주곡 21번 2악장 안단테가 흐르지만, 그들이 불안하거나 혼자 있을 땐, 비발디의 곡이 흐른다. 

    영화에서 비발디의 곡이 흐르는 경우는 대개가 자유를 열망하는 존재들의 외침인 경우가 많다. 빨간 머리 사제(천주교회 신부) 비발디는 권위를 부담스러워 했으며, 그는 재단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대신 교회의 빈민구제소에 수용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곡을 작곡했다. 그의 음악에 자유로운 열망을 갈망하는 코드가 생성된 이유이다. 

    한편 인간 불평등의 조건을 인위적 제도에서 찾은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다. 여기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는 모든 작위적 불평등의 요소를 제거한 절대적 자유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자연 상태란 것이 완전히 평등한 조건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엄연히 약육강식과 같은 생태계의 질서가 있기 마련이기에 불평등한 요소는 자연에 내재돼 있다. 여차하면 배를 곯고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 요원한 일이다. 이는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다. 계몽주의 사상을 설파하기 위해 기존의 기득권의 질서라는 것의 허상을 드러내기 위한 은유이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영화 ''엘비라 마디간' 스틸컷

    영화에서는 유독 풀벌레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은 위와 같은 사유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자연의 상태에서 온몸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두 남녀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식스틴이 나비를 쫓던 엘비라를 총으로 쏘고 자신의 머리에도 방아쇠를 당긴다. 실제 사건을 극화한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서 이 장면은 엘비라가 나비를 잡는 순간 정지영상이 되고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가 영원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작금의 자유는 근본적인 의미의 자유와는 괴리돼 있는 듯싶다. 자연인으로서 한 인간의 절대적 자유가 아닌, 물질의 자유, 자본의 자유가 그 우의를 차지한 지 오래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목적론적 자유는 점차 타자를 대상화해 간다.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가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놓을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를 노래하는 영화가 엘비라 마디간이다.

    한 가지 더 힌트가 된다면 극 중 엘비라가 파리에서 자신에게 그림을 그려준 화가의 작품을 전당포에 싼 가격에 파는 신이 나온다. 그때 그 화가는 실제 모델이 있다. 바로 인상주의에 강한 영향을 주고받았던 앙리 툴루즈 로트렉이 바로 그다. 어려서 겪은 여러 번의 사고로 평생 척추장애와 함께한 로트렉은 귀족 출신이다. 

    그는 붓을 잡았고 출신과 장애를 넘어 파리 몽마르트르의 번화가 클리시 거리의 카바레 물랭루즈에서 무희들을 그렸다. 선천적인 조건을 타파하고 후천적인 조건을 극복한 예술가 로트렉은 모차르트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엘비라 마디간'은 1960년대 후반 청년문화와 18세기 격동기를 관통한 천재 모차르트를 매개한다. 당대 젊은이들이 꿈꾼 사회는 그들 스스로 주체가 되지만 그 누구의 주인이 되는 것을 거절하는 세상이다. 때문에 68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 구심점 없이 원심력으로만 이루어진 혁명의 물결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논리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상상물의 효과'에 불과한 권위를 상상력으로 맞서려 했던 위대한 도전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세미나를 마친 학생들의 눈빛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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