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김씨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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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김씨 표류기'

    • 입력 2020.06.15 10:50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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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그런 영화가 있다. 한번 보면 마냥 웃긴 코미디물 정도로 여겨지나,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작품이 있다. 이해진 감독이 연출한 2009년 작 ‘김씨 표류기’가 바로 그런 영화다. 두 번째 영화를 봤을 때 언어가 보였고, 세 번째 보았을 때는 구조가 보였다. 

    무엇보다 의미가 있었던 것은 학생들과 영화를 보고 세미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질문이 있었다는 점이다. 수업을 통해 훈련된 학생들인지라 사소한 것에도 왜라는 질문을 단다. 연출자의 기획의도와는 별개로 텍스트를 다루는 교수자로서 질문에 응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을 가지고 있다. 질문한 이에게 ‘무의미한 질문’이라고 질책하는 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다.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폭력은 교탁만큼 알량한 높이의 권위를 내세우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덕에 가끔은 세미나가 산(山)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실보다 득이 더 많다. 사유에 대화만한 것이 없기에 그렇다. 질문과 답의 공방 속에 생각의 힘은 커지고 어떤 이치와 만나는 경험의 기회가 주어진다. 따라서 대화에 기초한, 상호작용을 실현하는 세미나는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네이버 영화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스틸컷)

    '김씨 표류기'의 줄거리는 두 인물을 쫓아간다. 그 한 축은, 직장에서의 해고되고 카드빚에 시달리던 남자(정재영 분)를 따라간다. 극의 초반, 그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한강에 투신한다. 그러나 죽는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갑갑하기 그지없는 사내는 무인도에 표류하고 만다. 그런데 그 섬이란 곳이 바다 멀리 어디쯤이 아니라 여의도에서 멀지 않은 밤섬이다. 멀리 63빌딩이 보이고 한강다리도 보인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에게 응답하는 이는 없다. 

    자포자기의 사내는 재차 죽음을 시도하지만 예의 실패하고 만다. 이제 허락된 일은 몸뚱어리를 움직여 허기를 채우는 일이다. 바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속세의 삶에서 생활고에 시달린 남자에게 이제 갚아야 할 것은 돈이 아니다. 채워야 할 배때기가 주인이다. 그 주인을 위해 열심히 채집과 사냥을 하고 농사를 시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생존에 성공한다.

     

    (사진=네이버 영화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스틸컷)

    이야기의 또 한 축은 한 여자(정려원 분)가 있다. 여자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다. 집단 따돌림으로 고교를 중퇴하고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장기간 은둔에 들어간 이다. 낮에는 장롱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밤에만 나와 창에 걸터앉아 줌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달 사진을 찍는 일이 그녀의 유일한 일과다. 

    그녀의 또 다른 해방구는 인터넷 사이버공간 싸이월드(이젠 사이트의 폐쇄로 디지털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진 사이버공간이 돼 버렸다.)에서 타인을 사칭해 가짜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의 페이크 라이프는 그녀를 알고 있던 지인들에 의해 들통이 나고 극기야 퇴출돼 버리고 만다. 어느 곳에도 그녀가 설 공간은 없다. 삶을 끝내려던 그녀의 눈에 띈 것은 무인도서 묵묵히 생명을 연장해 가는 벌거벗은 한 남자다. 

    극은 이 두 인물을 교차하며 잔잔하고 소소한 웃음을 유발하며 끌어간다. 딱히 드라마틱한 구성도 없다. 물론 이 두 인물은 만남을 시도한다. 짜장면 배달부가 이들의 메신저가 되기도 하고,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여자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중무장한 채 죽음과도 같이 그에게 돌진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인물이 사는 생활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밤섬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남자는 태양의 주기를 따른다. 검게 그을린 몸으로 먹을거리를 채집하고 급기야 농사까지 짓는다. 한 끼 식사를 위해 그는 씨를 뿌리고 두 계절을 기다려 마침내 옥수수낱알을 얻게 된다. 그것을 빻은 전분으로 면을 만들고, 거기에 쓰레기더미에서 주운 짜장 스프를 비벼 짜장면을 만들어 먹는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그는 공전의 주기에 맞춰 농사를 짓고 수확을 통해 얻은 음식 앞에 의례와 같은 식사를 한다.

    한편 여자는 공전도 자전도 허락하지 않은 사이버공간을 부유한다. 그러다 자신의 카메라에 잡힌 남자의 일상을 관찰하게 되면서 밤과 낮이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전의 주기를 회복하게 된다. 여자가 달 사진을 찍는다는 설정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본능으로 생산의 신 루나에 대한 메타포다. 일상의 주기를 잃고 중력의 이끌림으로부터 이탈돼 가던 그녀가 무인도의 남자에게 강한 인력을 느끼게 됐을 때, 비로소 둘은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된다. 

    현대의 우리는 하나의 주기를 살 수 없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위태롭게 우리 삶을 올려놓기도 하고 무료한 듯 태양을 피해 달의 주기를 맞춰 살기도 한다. 공전의 주기를 지향하며 농사와 같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때론 어딘가에 정착한다. 다양한 패턴의 삶의 주기가 엉킨 실타래를 조심히 풀어내면 우리 모두는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로 가득 찬 생명체다.

    코로나19 사태로 우리 사회는 ‘언택트 시대’를 맞게 됐다곤 하지만 실존의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매개된 존재들이다. 우리가 매개돼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포스트 코로나 이후 우리는 새로운 여정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무인도의 그 남자도 아파트 장롱 속의 그녀도 그 유폐된 공간을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농사를 짓는 태양신도 생산의 의지 자체인 달의 신도 별도로 존속이 불가능한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불완전함을 각성할 때 우리는 하나를 지향할 것이다. 남녀의 만남이 그럴 것이고 분단된 조국의 만남도 그럴진대 어찌 그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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