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의 세상읽기] 성경해석의 방법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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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의 세상읽기] 성경해석의 방법과 한계

    • 입력 2020.06.11 06:50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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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성 강원대학교 명예교수·한국헌법학회 고문
    김학성 강원대학교 명예교수·한국헌법학회 고문

    성경과 같이 초자연적 세계를 다루는 경전에 대한 해석은 성직자의 몫으로, 세속의 법학자가 함부로 나설 영역이 아니다. 다만 성경의 특수성을 제외한 보편성 영역에 대해서는 세속의 해석방법도 나름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법률해석의 가장 기본적 방법은 문리적 해석이다. 문리적 해석은 문언의 어학적 의미를 분명히 하여 법 규정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법문의 어학적 의미는 문언의 의미발견 외에 문언이 담을 수 없는 한계를 분명히 한다. 문리적 해석에서, 첫째 법문의 의미가 뚜렷해서 한가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일의적으로 규정된 조문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허용되지 않으며, 둘째 내용이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때에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셋째 이러한 경우에도 다른 규정과의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하고 체계에 부합돼야 함은 물론이다.
     
    유신 진화론이란 하나님이 인간 등을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좀 더 들여다보면 해괴망측해 소름이 날 정도로 섬뜩하고, 입에 담기도 두렵고 허망한 내용 들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보기로 한다.
     
    유신 진화론이 주장하는 내용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내용을 다음의 몇 가지 유형으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창조하지 않았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직접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법문의 의미가 뚜렷해서 한가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일의적으로 규정된 경우에는 다른 해석이 허용되지 않듯, 성경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과정을 그 재료와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위 구절은 일의적으로 규정돼 있어 다른 해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위 주장은 내용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필요성을 떠나, 판단 받을 자격조차 없다. 법적으로, ‘이유 없다’가 아니라 ‘요건이 안 된다’에 해당한다. 소위 3류 소설에도 못 미치는 내용이 저명한 성경학자들의 주장이라니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성경을 아예 전부 부정할 것을 권한다.
     
    둘째, “우주는 약 140억 년 전에 창조됐고,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와 자연선택으로 생물학적 다양성과 복잡성이 생겨났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이미 지구에는 수천에 이르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한다. 또 아담과 하와는 사람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유인원과 조상을 공유한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왜 반박을 해야 하는지에 의문이 든다. 이들은 성경해석의 한계를 넘어 성경 유사한 책을 새로 쓰고 있다. 통일교나 신천지와 같은 유사종교를 창립할 것을 권한다.

    셋째, 원죄를 부정한다. “아담과 하와는 첫 번째 죄를 짓지 않았고, 이들 이전의 선행인류들이 이미 도덕적으로 악한 일을 했다고 하며, 아담과 이브는 무죄한 상태로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 성격해석은 다른 성경 구절과의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하고 체계에 부합돼야 한다. 위 주장은 성경(누가복음)이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최초의 사람으로 아담을 언급한 것과 모순되며, 성경(고린도전서)이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 것과도 모순되기에, 체계적 해석에 저촉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성경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이에 저촉되는 해석은 절대로 허락될 수 없다. 위 주장들은 성경에 본질적 부분을 부정하는 것으로 가당치 않으며, 해석의 한계를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다른 곳에 가서 새로운 교리를 가지고 장사를 할 사람들이 성경과 창조주를 언급하면서 교회라는 테두리 내에서 교회를 조롱하고 있다. 아예 딴 살림을 차리길 바란다.

    문리적 해석방법은 성경해석론에서 등장하는 문자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나 구별된다. 문자주의는 문자적 의미에 매몰돼 다른 해석 가능성을 일절 배제, 해석에 유연성이 부족하고 고지식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문자주의를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을 탓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요한계시록)은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제하면, 재앙을 받거나 거룩한 성(城)의 참여를 불허한다고 엄하게 경고하고 있기에, 문자주의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해석, 특히 창조주의 영역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임해야 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 입맛대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신학대학에 유신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경학자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인데 성경을 입맛대로 새롭게 쓰고 있다니 말문이 막힌다. 유신 진화론은 하나님을 한껏 능멸하고 조롱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는데, 첩들과 놀아나면서 아직도 조강지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예수의 말씀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면서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역겹기까지 하다.

    성경해석에서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춰서는 안 되며 자기 입맛을 성경에 맞춰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해석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신학교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학자가 없다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는가’라는 성경 말씀(누가복음)이 새롭게 다가온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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