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그린 파파야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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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그린 파파야 향기

    • 입력 2020.06.01 10:44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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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를 연출한 트란 안 훙 감독은 베트남계 프랑스인이다. 그는 베트남 다낭 출신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정착한 이민 2세다. 그린 파파야 향기를 발표한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세자르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은 기세를 이어, 이듬해인 1995년 두 번째 장편영화 ‘씨클로’로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장을 수상했다.

    트란 감독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내러티브보다는 영상미와 음향에 집중한 탐미주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를 톺아보면 그런 평가가 무색해진다. 뛰어난 영상미와 아름다운 음향 뒤에 서사를 숨기고 역사적 맥락을 비틀고 있다.

    우선 작품이 기획된 시기, 그가 묘사한 베트남은 기존의 것과 남다르다. 영화가 개봉되기 몇 년 전, 영화 람보 시리즈(람보2 1985년, 람보3 1988년)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다. 할리우드를 통해 전 세계에 배급된 이 ‘전쟁게임콘텐츠’는 베트남인들의 이미지를 악랄한 베트콩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종의 ‘뒤끝작렬’이라 할 수 있다. 1975년 베트남전쟁에서 패한 미국은 80년 미국의 호황을 계기로 스크린 위에서 만이라도 복수를 해야만 했을 터다.

    여하튼, 이러한 문화정치의 공세로 베트남은 충분히 저열한 민족이 돼 있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베트남의 정적이고 목가적인 환경에서 한 소녀가 성장해 여인이 돼가는 과정을 담은 그린 파파야 향기는 일종의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도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에 대한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는 프랑스의 한 세트장에서 촬영됐다. 영화가 기획된 시점에서는 베트남현지촬영을 고려했으나 베트남 정부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점만 보아도 베트남과 서구의 앙금은 매우 고조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전쟁광 베트콩들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몰락해가는 귀족 집안의 허무해 보이는 일상을, 그 집에 하녀로 고용된 어린 소녀가 바라보는 시점으로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결코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다. 

    영화는 1951년에 시작해 1961년에 끝이 나는데, 이 시기는 1차 인도차이나반도전쟁(1946년~1954년)을 관통하고 있고, 또한 2차 인도차이나반도전쟁(1964년~1975년)이 일어나기 전 1961년 미국이 자유월남정부의 후견 역할에서 공산정권인 월맹정부와 전쟁을 준비단계인 참전 단계로 태세전환을 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군인이 등장하는 신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서사가 배제된 탐미주의 영화라는 평가는 오독이다. 

    영화에서 전쟁은 사운드로만 등장한다. 자연의 새소리 풀벌레 소리도 가득 찬 소리의 향연에 취해 자칫 놓칠 수 있는 ‘전쟁시기’였음을 상징하는 효과음들이 영화 중간에 배경으로 삽입돼 있다. 사이렌소리, 뱃고동소리, 비행기소리 그리고 영화의 말미 1961년에 가서는 제트기소리가 곳곳에 배치된다. 이로써 목가적 풍광 이면에 우울한 전쟁의 기운이 깔려있다. 

    전쟁의 와중에도 거리의 민중들은 삶을 꾸려간다. 신산한 그들의 역사를 인내하는 민초들은 노랗게 익은 달콤한 과일 파파야가 아니라 배고픈 시기, 일상의 밑반찬이 돼주는 채소 같은 덜 익은 그린 파파야’와 닮아있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소녀 무이(그린 파파야)는 여인으로 성장하고 집안의 안주인(노랗게 익은 파파야)이 되어있다. 

    이는 신데렐라 코드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묵묵히 식민의 시대를 인내하고 견디고 싸워 이긴 베트남 민초들이 인도차이나의 동쪽 해안가를 따라 길게 형성된 땅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코드가 바로 영화에 사용된 클래식 음악이다. 영화에는 대중에 잘 알려진 드뷔시의 ‘달빛’이 극 중 도련님 쿠엔에 의해 연주된다. 그리고 쇼팽의 전주곡 23번과 24번이 연달아 이어져 들려온다. 

    우선, 드뷔시의 달빛은 양가적인 해석이 가능한 일종의 장치로 볼 수 있다. 드뷔시의 음악은 클래식음악사에서 인상주의로 범주되는데, 재미있게도 인상주의음악은 드뷔시가 유일하다. 후기낭만주의와 차별되는 드뷔시의 음악의 특징은 온음 5개를 사용하는 분산화음이 특징인데, 이렇게 구성된 음악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드뷔시가 활발하게 작곡활동을 하던 시기는 프랑스가 여러 시민지를 차지한 제국주의시대와 맞물려 있다. 제국주의시대 서구인들은 이국취향을 즐겼다. 식민지로부터 유입된 이국적 정서를 향유하는 것은 제국주의시민의 권한이자 고급 취향쯤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듯싶다. 

    그린 파파야 향기가 영화제에 초대되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한 칸의 프랑스관객들에겐 드뷔시의 음악과 함께 아라베스크문양으로 가득 채운 베트남 귀족집안의 풍광은 제국주의향수를 불러오기 충분했다고 본다. 따라서 베트남민족이 견뎌낸 식민의 역사와 침략의 역사가 배경으로 풍경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애써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심리인 게다.

    하지만 드뷔시의 달빛은 주인공 무이를 위한 테마곡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결국 귀족주의와 식민의 정치를 벗어나고자 한 베트남지식인을 은유하는 쿠엔과 한 몸을 이루고 마침내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 달빛은 ‘생산의 여신 루나’에 대한 테마곡이고 루나는 바로 무이가 되는 셈이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드뷔시를 연주하는 쿠엔과 그 주변을 조용하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집안을 가꾸는 무이를 담은 신이 풍경을 넘어 서사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한편 쇼팽의 음악은 보다 직접적이다. 그런데 먼저 그에 대한 해석에 앞서, 쿠엔의 애인이 그의 머리를 만지면서 하는 대사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쇼팽의 전주곡 23번은 연주하는 쿠옌에게 “베트남 여인 중 애인의 머리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쿠옌은 돌연 쇼팽의 전주곡 24번을 격정적으로 피아노로 옮긴다. 

    23번 F장조와 24번 d단조는 후대에 표제가 붙는데, 전자는 물의 여신의 장난으로 목가적이고 경쾌한 반면 후자는 분노로 가득 차있다. 얼핏 애인이 머리를 만졌다고 분노조절을 못하는 전근대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으나, 맥락을 살펴보면 정반대이다. 

    쿠엔은 서구화된 진보적 베트남지식인으로 공화주의를 꿈꾸는 민족주의자쯤으로 포지션을 설정하면 그 해석의 실타래가 풀린다. 과거 베트남의 영웅 떠이 썬이 이끈 농민반란(1771년)으로 몰락한 응웬 가문은 후대에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응웬 왕조를 세운다. 무능한 왕조는 결국 1883년에 아르망조약으로 전 국토를 프랑스에게 식민지로 내주고 만다.

    응웬 왕조와 프랑스제국주의 그리고 그에 협조한 베트남귀족세력의 잔존세력 쯤으로 설정된 애인의 집안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불러온 것을 반성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국의 식민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역사적 배경이 배후에 깔려있다. 생활패턴과 문화가 서구화된 구세력은 베트남지식인의 머리를 조정하려 들고 반동의 시간을 반복할 준비가 돼있을 즈음, 쿠엔이라는 캐릭터로 설정된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로 각성된 베트남지식인은 구체제와 결별을 선언하고 무이라는 민중세력과 결합을 통해 공화국모델의 민족국가를 세울 준비를 마친다. 

    영화에선 임신한 무이에게 쿠엔이 글을 가르치는 모티브로 재현되었다. 극의 마지막에 무이는 책을 읽으며, 어떤 구절을 암송한다. “그늘에 우뚝 선 버찌나무는 가지를 힘차게 뻗어내고, 물의 리듬에 맞춰 가지의 굴곡을 정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변화가 심하다 해도 버찌나무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녀는 정면을 응시한다. 

    이는 베트남민중의 역사가 고난을 견뎌낸 과정에 대한 은유이며, 항구할 것이라는 일종의 선언이다. 영화가 미국이 적극적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에서 군사적 활동을 공고히 하는 1961년에 끝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제국주의 식민정책과 싸워 이긴 베트남민중민족주의세력의 항전의지가 무이라는 가냘파 보이는 여인에게 투사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개봉되고 이어진 트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은 공산화된 호치민시(구 사이공)의 암울한 범죄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베트남 정부는 그린 파파야 향기 때와는 달리 영화촬영을 허락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역시 맥락을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1995년 7월 11일, 그간의 반목을 뒤로하고 미국과 베트남은 국교를 단행한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영화가 미친 힘은 아니다. 미국과의 지난한 전쟁이후에 바로 발발한 캄보디아와 전쟁 그리고 이어진 중월국경전쟁까지 14년간에 이르는 3차 인도차이나반도전쟁(1975년~1992년) 역시 승리로 이끈 베트남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소련이라는 거대적대세력이 와해된 시점에서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중국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교두보라는 전략적 선택이 작용했다는 것이 팩트이다. 그럼에도 그린 파파야 향기는 베트남을 새롭게 보게 한 신선한 충격이었음은 변하지 않는다. 

    코로나사태초기 베트남이 보여준 미숙한 외교적 조치에 적잖이 많은 우리국민들이 속상한 감정이 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방역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베트남의 사정을 고려할 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성숙한 대한민국의 자세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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