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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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아마데우스

    • 입력 2020.05.11 09:54
    • 수정 2020.05.12 18:25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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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1984년 작, 영화 '아마데우스'는 개봉 당시 대중적인 성공은 물론 아카데미상 12개 부분을 석권한 수작이다. 쾨헬 넘버 183번, 교향곡 25번 G-minor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가히 압도적인데, 음악영화로써도 손색없는 모차르트입문서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와 그의 죽음을 회상하는 플롯으로 진행되는 살리에리의 독백을 쫓아가다 보면, 인간 심리의 저간을 훔쳐보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정교하게 구성된 심리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마데우스'가 동시대, 이후 사회문화사적으로 끼친 영향력을 보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체코 출신 밀로스 포먼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을 톺아보면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전작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사람(1975년 작)’만 보더라도 체제수호적인 권위주의와 왜곡된 민주주의가 만났을 때, 개인의 자유가 어디까지 속박될 수 있는지 그 실체를 우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명작이다.

     

    (사진=네이버 영화 아마데우스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아마데우스 스틸컷)

    후속작인 '아마데우스' 역시 당대의 레이거노믹스체제를 교묘하게 뒤틀고 있다. 영화는 금융자본주의를 통해 세계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만연한 엘리트주의와 그에 따른 경쟁체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데우스' 열풍은 ‘천재교육’ 혹은 ‘살리에리증후군’이라고 명명된 2인자에 머물지 말고, 서러우면 1인자가 되라는 메시지로 소비된 경향이 농후하다. 말하자면 영화를 원용해 질투하면 지는 거라고, 오히려 경쟁에 몰입해 기어코 일등이 되라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위와 같은 분위기는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무드를 타고 세계시민의 의식을 서서히 잠식하게 된다. ‘세계화’란 그물을 짜서 그 안에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하려 했던 세력이 신자유주의를 주창한 금융자본주의자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일부 정치권과 대중 일반은 그 물결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들 엘리트주의자들이 만든 이데올로그가 바로 낙수효과다. 이로써 소수의 천재가 세상을 이끌고 그 후과로 세계인들이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십여 년 시간이 흘러, 미국에서는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천재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근거 약한 데이터를 들고나와 한몫 톡톡히 챙긴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베이비 아인슈타인 브랜드 창시자 줄리 아이그너-클라크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열풍을 타고 조기교육 붐이 일었다. 동시에 각종 분야에서 천재가 속출하기도 했다. 

     

    (사진=영화 '아마데우스' 스틸컷)
    (사진=영화 '아마데우스' 스틸컷)

    한편, 기업 분야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했는데, 천재경영자가 재계에 등장하여 전 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글로벌 경영을 금과옥조로 여기다가 이후 파산하여 법망을 피해 세계 곳곳을 떠돌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은 일류라고 한껏 치켜세우고 나서 기업은 이등, 정치는 삼류라고 일갈했다. 이는 그간에 벌어졌던 정경유착의 원인제공이 전적으로 정치권에 있다는 책임 전가를 행간에 담고 있었으며 이제 이 같은 고리를 끊고 세계 일류기업으로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약속이기도 했다.

    이때 등장한 광고는 지금도 회자된다. ‘세상은 일류만을 기억합니다’라는 카피는 그 시대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미 일류가 됐다고 선언된 국민들은 모두가 기업이 일류가 되도록 ‘올인’한 시기이기도 했다. 국내에 만연해 있던 구조적인 모순과 국제금융자본의 국내금융계를 장악하기 위한 음모 등, 일련의 복잡한 과정 속에 IMF사태가 터졌을 때도 모두 기업을 살리는 길 만이 우리가 잘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고 금모으기에 동참하기도 했다. 부추김을 당한 흔적이 역력함에도 선한 의지를 가진 국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이후 우리 시민사회는 여러 부침을 잘 극복해 왔고 진보를 넘어 진화를 거듭했다. 그 사이 정치권은 크게 두 번의 권력 이동이 있었고, 현재에도 개혁은 진행 중이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변화를 직시하고 환골탈태를 해야만 할 시점에 직면했다. 더이상 국민은 삼류, 아니 이류정치도 인정하지 않을 분위기가 고조됐다.

     

    (사진=영화 '아마데우스' 스틸컷)
    (사진=영화 '아마데우스' 스틸컷)

    다시 이야기를 '아마데우스'로 돌아와, 포먼 감독의 연출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의 표면에 배치된 살리에리의 심리묘사로 인해 영화는 분명 반동의 이데올로그에 복무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에 걸쳐 전개된 신자유주의를 관통하며 우리는 봉건체제의 왕 혹은 20세기 전반기의 독재권력 대신 대중사회는 기업인들과 스타들을 우러러보며 우상시해 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사실 우리가 '아마데우스'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혁명의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한 18세기 절대왕정시기 체제에 딱히 저항할 의사나 투지 없이도 그 자체로 자유로운 영혼을 실천하다가 세상을 마감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레이건 집권기인 1980년대 중반에 도대체 왜 소환했는가다.

    영화는 살리에리라는 내면의 경쟁자를 이야기로 재구성해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극중에서 그는 모차르트를 엄습하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읽어낸다. 신동으로 여기저기 팔려가며 왕과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돈을 벌어야 했던 어린 소년 모차르트에 각인된 강박의 그림자를 이용해 살리에리는 아버지와 같은 분장을 하고 레퀴엠(진혼곡)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한다. 그것도 기한을 독촉해가면서 곡을 일정 시간에 맞춰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모차르트는 끝내 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멈춘다.

    아버지의 그림자로써 일종의 성과주의가 모차르트를 죽음에 내몰게 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자유주의경쟁체제를 관통해 오면서 창의적이고 비전이 밝아 보이는 젊은이들이 성급한 성과주의에 몰려 추락해 온 것을 목도해 왔다. 그리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 성과란 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왔고 착취당해 왔는지 일일이 손꼽지 않더라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런 시기, 계급계층의 수직 사다리를 오가는 일이 더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 때 우리 재계의 전도유망한 리더가 더이상 기업의 가족 승계는 없다고 선언했다. 덧붙여 앞으론 무노조 경영을 포기하고 노조 활동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왜 이리 낯설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20년도 전 그의 부친이 이미 일류기업이 되길 선언했다. 그 세월이 무상하게도 그간 당연한 것을 하지 않고 편법을 일삼아온 일에 대한 반성과 사죄 대신 또다시 미래형의 약속을 던지고 현재를 면피하려는 속내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기우란 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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