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악마라는 자의식’은 어디로부터 형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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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악마라는 자의식’은 어디로부터 형성되는가?

    • 입력 2020.04.27 10:46
    • 수정 2020.04.27 11:10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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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문제작 ‘시계태엽 오렌지’는 감독의 뜻에 따라 27년간 상영 금지된 작품이다. 1971년 극장개봉 이후 많은 청소년이 등장인물 알렉스와 그 일당의 만행을 따라 한 모방범죄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로 설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악행은 가히 엽기적이다. 우유같이 하얀 음료를 들이키고 폭력을 행사하러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은 호기롭다 못해 전사처럼 보인다. 마약, 폭력, 강간 등의 묘사가 코미디장르처럼 표현돼 아이러니컬하게도 더욱 음산하다. 키득거리며 벌이는 악행을 카메라로 잡을 때는 영락없이 로시니의 오페라 도둑까치의 서곡이 흐른다. 종종거리며 반짝거리는 은수저를 훔치는 까치의 움직임과 그들이 벌이는 폭행이 매치될 때 폭력의 악랄함은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 알렉스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마니아다. 마약카페에서 누군가 합창의 독주부분을 노래하기라도 하면, 비아냥거리는 또래 무리와는 다르게 경외의 제스처를 취한다.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알렉스는 재미 삼아 강도를 벌이고 피해자들을 유린한다. 그러고 나서 전리품으로 챙긴 약간의 돈과 귀중품을 서랍에 던져두고 예의 교향곡 9번 합창을 듣는다. 고급스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 맞춰 알렉스는 역사적 현장에서 폭력의 주체들에게 자기 자신을 대입하며 백일몽에 빠진다. 젊은 시절 필자가 이 장면을 봤을 때, ‘어떻게 합창 교향곡을 이딴 식으로 사용하지’하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불경스러워 보였다. 

     

    시계태엽 오렌지 스틸컷.
    시계태엽 오렌지 스틸컷.

    영화의 불편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부하로 여겼던 또래 동료로부터 배신당한 알렉스는 범행현장에서 체포돼 교도소로 보내진다. 그곳에서의 알렉스는 교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알렉스가 벌이는 폭행의 대상은 늙고 약한 존재들이었을 뿐 정작 사회 주류의 강한 권력을 지닌 이들 앞에선 순한 양의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럼에도 그의 상상의 영역은 건들 수 없었는지 교화프로그램으로 성경을 읽는 동안에도 그는 폭력과 섹스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알렉스가 모범수로 가석방되기 위해 ‘루도비코 치료’라는 갱생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일종의 화학요법으로 범법행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신체적인 고통에 빠지게 된다. 이때에도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이 울려 퍼진다. 이제 합창 교향곡은 그에게 조건반사실험의 기폭제가 되고 그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역한 생각에 구토가 나오게 된다. 이처럼 완벽한 대상으로 전락한 채로 알렉스는 퇴소하게 된다. 

    출소 후, 거리에서 린치당하고 도망쳐 찾아 들어간 집이 하필이면 자신이 강도강간을 벌인 작가의 집이었다. 반체제활동을 벌이고 있던 그는 알렉스를 이용해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트리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알렉스가 자신을 불구로 만들고 아내를 자신이 보는 앞에서 능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크게 틀어 알렉스가 고통 속에 자살을 시도하게 만든다. 

     

    시계태엽 오렌지 스틸컷.
    시계태엽 오렌지 스틸컷.

    이쯤에서 마무리했어도 ‘전체와 개인’의 문제라는 고전적 주제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소설에서 알렉스가 순응자가 돼 사회에 복귀한다는 설정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다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다른 선택을 했다. 큐브릭이 연출한 알렉스는 다시 ‘악마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극적으로 살아난 알렉스는, 자신을 실험체로 교화프로그램을 운영한 일이 언론에 폭로돼 위기에 처한 정부의 내무장관 제안을 받게 된다. 

    알렉스를 역으로 이용하려는 장관의 계략으로 반체제작가는 감옥에 갇히는 영어의 신세가 되고, 알렉스는 대형스피커가 달린 음향기기를 선물 받는다. 물론 그 오디오에선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울려 퍼진다. 또다시 정부의 재활프로그램치료를 받고, 기존의 루도비코 갱생프로그램의 고통에서 벗어난 알렉스는 다시 그가 좋아하는 합창 교향곡을 만끽하며 폭력과 섹스를 생각한다. 그렇게 영화는 마무리된다.

    사실 이 영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을 관통하는 유럽의 혁명기와 반동체제시기, 그리고 영화가 제작되기 전에 벌어진 68혁명 직후의 시간을 대위하고 있다. 큐브릭은 신랄한 풍자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권위의 주체만이 바뀔 때, 반동의 정도가 얼마나 가공할 만한지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68혁명의 기세에 우파정권의 영웅 드골이 내려왔음에도 곧바로 그 자리를 드골정권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가 대신했기 때문이다.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퐁피두란 이름은 우리에게 퐁피두센터로 잘 알려져 있다.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이 건물은 기능주의 강조한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 모델로, 건물 외벽으로 각종 설비시설이 드러나 있어서 짓다 만 것처럼 난잡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외장을 화려하게 꾸며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내부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하수도관 및 배관, 통풍시설이 외벽으로 나옴으로써 권위주의를 내려놓았다는 상징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럴듯한 해석과 포장과 달리 이름에서부터 드골의 후임 대통령의 이름을 딴 퐁피두센터이고 권위를 내려놓은 제스처를 취했을 뿐, 오히려 그 권위를 교묘한 방식으로 연장하려는 세력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큐브릭은 동시에, 청년들의 아래로부터 문화혁명이 자칫 외설적인 자유주의 풍조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는지도 모른다.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일관된 큐브릭의 생활패턴으로 봤을 때, 그에게 젊은이들이 권위를 부정하며 벌인 여러 행동 중에 아나키즘과 히피문화적인 흐름은 일견 방조로 보였을 것도 같다. 폭력, 마약, 섹스, 강간을 일삼은 것이 권위를 부정하는 일이냐는 일침은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가의 교조적 태도로 읽힌다. 말년의 괴테가, 말년의 톨스토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스틸컷.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스틸컷.

    여하튼 큐브릭의 대표작 시계태엽 오렌지는 다양한 논란을 불러왔던 만큼 그 해석도 다채롭다. 이후 여타의 여러 감독의 걸작들이 바로 이 작품에서 연유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영화임이 틀림없다. 대표적으로 코엔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시 이 작품을 일종의 생성텍스트로 삼아 출발하는데, 바로 영화가 어떤 패턴을 반복하며 등장인물들을 그 속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은 시계태엽 오렌지의 도입 부분에 거리의 부랑자 노인이 알렉스와 그 일당들에게 린치를 당할 때 절규하듯 뱉어낸 말이다. 코엔형제는 이를 모티브로 젊은이들이 노인이 되기 전에 돈이 부리는 마술에 걸려 노인이 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패턴의 반복을 연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배치하고 있다.

    우리는 한쪽으로 구조가 문제고 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선 인적구성만을 바꿔 왔다. 혹은 행여 어렵게 제도를 바꾸더라도 어떻게든 교묘히 활용해 지배이데올로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운영해 왔다. 때문에 발전하고 진보한 법과 제도가 도리어 더 많은 소외를 불러오고 분배의 정의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운영돼 온 것을 너무도 많이 보게 됐다.

    새삼스레 오래된 고전 시계태엽 오렌지를 꺼내 소개하는 이유는, n번방 사건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파렴치한 성범죄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은, 증거가 명백함에도 권력을 배후에 둔 덕에 슬그머니 풀어주는 ‘김학의 사건’과 같은 일들이 반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주장은 정확한 진단이다.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어쩌면 이번 사건이 만천하에 밝혀지지 않고 수면 아래 가라앉아버렸다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그것을 토대로 사회적 성공을 거뒀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미래의 언젠가 권력의 러브콜을 받고 정계에 진출할지도 모른다. 4차 산업시대에 맞는 모델로 수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 끔찍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가 선물 받은 것이 거대한 스피커를 가진 오디오시스템이라는 설정은 미래의 그가 극 중 권력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내무장관의 후계자임을 은유한다.

    현실원칙의 법체계가 온전히 작동하지 못할 때, 극단적인 쾌락원칙의 사드와 같은 인물이 버젓이 세상의 규율을 지배하려 들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특별히 위계에 위한 성범죄는 엄히 단죄돼야 한다. 그래야만 또다시 피해자가 아닌, 권력을 가진 이들을 향해 “악마의 삶을 벗어나게 해줘 감사하다”식의 언어도단으로 2차, 3차 피해를 일삼는 일은 그나마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악마라는 자의식’은 권력 집단의 그릇된 신호를 접수하고 더 나아가 롤모델로 삼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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