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영화 ‘인생’, 새옹지마와 전화위복의 중간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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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영화 ‘인생’, 새옹지마와 전화위복의 중간쯤

    • 입력 2020.04.20 09:46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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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가끔 우울할 때 마음 한구석에 챙겨 둔 영화 한 편을 꺼내 본다. 장이모우 감독의 수작 ‘인생’이다. 인생은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슬프고 아련해서 아름답지 않다. 그보다는 굵직한 역사적 곡절을 넘어 살아남은 이들의 허허로운 웃음을 마주하게 되며, 아련한 만큼 처연하게 다가온다. 극 중 인물들의 생로병사를 보고 있자면, 견뎌내야 할 일들 앞에서 이겨내야 할 당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 동력은 바로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사실 한자(漢字)의 사자성어를 접할 때마다,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흔히 쓰이는 안빈낙도(安貧樂道) 같은 조어는 체제수호적인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통적인 유교 질서에서 학문은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자체로서 목적이 돼야 한다. 때문에 과거에 입신하지 못한 이들이라도 유생으로서 제 도리를 다해 평생을 공부로 매진하다 흙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이들은 유흥이라도 벌일 양이면, 어김없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허위의식이다. 기다림의 끝판 왕, 팔순의 강태공은 가난 때문에 떠난 아내를 뒤로하고 빈 낚싯대를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왕의 간택을 낚아챈다. 하지만 그를 모델로 온 세월을 기다린 지방의 늙은 유생들을 위로할 말로 ‘강호한정’ 만한 말 그 이상은 없었을 것 같다. 유유자적한 삶 속에 연군지정을 읊으면 그로써 제 도리를 다했다는 자의식은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의 새옹지마 역시 마찬가지다. 변방의 노인은 말을 잃어버리고도 태연자약했으며 자신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어도 초연한 태도를 취했다.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제물을 잃고 자식이 장애인이 된 지경에 평정심이라니, 사실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럼에도 인생을 보고 있자면, 일견 수긍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포스터. 사진/인생 스틸컷
    영화 포스터. 사진/인생 스틸컷

    인생은 1946년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내전’ 직전부터 마오쩌둥이 장기집권 후 권력누수를 막기 위해 홍위병을 준동시켜 벌인 친위쿠데타로 ‘문화혁명기’를 관통하고 나서야 막이 내린다. 어림잡아 사반세기를 견뎌낸 한 가족의 비극과 생존을 위한 분투기를 다루고 있다. 노름으로 집을 잃지만 그 덕에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잡게 됐을 때, 도박 빚 대신 잡힌 집을 차지한 타짜꾼이 지주로 몰려 목숨을 잃게 된다. 투전으로 집을 잃지 않았으면 자신의 목이 효수됐을 것이다. 주인공 부귀는 두려움에 걸음조차 주체하지 못하고 형장을 도망쳐 나온다. 

    여기까지는 그러그러한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혀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혈육이상의 우정을 나눈, 동료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자식을 죽인 범인임을 알게 됐을 때, 부귀의 표정은 공황상태의 심리가 어떤 것인지 그 진수를 보여준다, 우리는 곧잘 절친한 이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의도치 않은 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영화 포스터. 사진/인생 스틸컷
    영화 포스터. 사진/인생 스틸컷

    반면 지나치는 인연으로부터 인생의 변곡점이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하고, 일면식도 없던 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도 한다. 인생을 초탈한 듯 피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터에 의심받기 충분한 변방 늙은이의 행동이 지혜와 현명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부귀는 그렇게 노인이 돼 가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일관된 태도로 삶을 살아왔는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조차 낭비로 여기는 빠른 일상을 살아왔다. 코로나 사태로 그 궤도가 잠시 멈췄다. 사람과 사람 간 교류가 적은 지금,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는 저마다 우울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잠시만 생각해보면 누군 성찰의 시간으로 보낼 수 있으나 어떤 이에겐 생계가 위협받는 기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움찔하게 된다. 우울조차 사치로 보일지도 모르기에 속마음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생활 일반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각 학교에서는 비대면 온라인수업으로 현재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벌어져 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이나 작은 도움이 어떤 이들에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삶에 동아줄이 되고 등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각할 때다. 이와 같은 자각은 우울을 극복하는 지름길이다, 우울은 자기애로부터 벗어나 타인과의 유대를 넓혀갈 때 극복되기 때문이다. 이타를 통해 이기를 도모할 기회기도 하다. 새옹지마와 전화위복의 중간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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