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주인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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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주인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 입력 2020.03.16 09:21
    • 수정 2020.03.16 10:46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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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 보르헤스의 작품 중 '또 다른 결투'라는 단편이 있다. 촌철살인 같은 작가의 짧은 글들을 접하다 보면 군더더기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칼잡이들의 이야기라는 소설집에 실린 이 작품 역시 인간 간의 증오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다. 별다른 해설을 붙일 필요가 없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사소한 시기가 증오로 발전한 실베이라와 까르도스라는 두 사내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집요하기까지 한 그들의 경쟁은 그 지방에서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됐다. 그러던 와 중 전쟁이 터진다. 둘 다 징집돼 전장에 함께 선다. 잠시 전우애가 싹트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이다. 오히려 전투현장은 우열을 가리기 좋은 장소다. 하물며 그들의 다툼은 포로가 돼서도 이어진다. 

    적군의 대장조차 이러한 사실을 안다. 그는 두 주인공에게 "나는 너희들을 세워놓은 채, 목을 쳐 죽일 거고, 그런 다음 너희들은 달리기 경주를 하게 될 거야. 하느님은 이미 누가 이기게 될지 알고 계시겠지"라고 말한다. 죽일지 말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스틸컷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스틸컷

    그가 내린 명령이 무엇인지는 바로 드러난다. 결국 두 사내는 참수형을 당하게 되는데, 머리가 떨어진 두 개의 몸은 앞으로 나가다말고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최종적으로 거꾸러지면서 팔을 뻗은 까르도스가 달리기에서 이겼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쉽고 건조한 문장에 담아낸 한편의 보고서로 읽힌다. 

    경쟁, 질투, 시기, 욕심 이 같은 것들이 모두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톨스토이의 후기작과 닮아 있기도 하다. 사실 보르헤스의 작품은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연을 맴도는 그의 작품을 쫓아가다보면 끝없이 연결된 우주와 우주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초단편류의 작품들은 사실을 나열한 르포르타주라고 봐도 좋을 듯싶은데, 묘하게도 설득력이 있다. 화려한 문장보다 단문의 힘인 듯싶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스틸컷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스틸컷

    한편 보르헤스의 작품을 아르헨티나 특유의 형식인 '가우초문학'의 계보에서 바라보는 분석도 있다. 우리에게 낯선 용어인 가우초란 라틴아메리카대륙 동남부에 펼쳐진 평야에서 가축을 방목하는 인부들을 말한다. 쉽게 연상하자면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을 생각하면 된다. 거친 사내들의 영토엔 법보다는 폭력과 권모술수가 판을 친다. 적은 돈이나마 벌어 살아남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들이다. 질퍽한 그들의 삶을 쫓아가다보면 연민도 사치가 된다.

    조금만 더 가우초문학의 경향에 대해 소개하자면 다음의 사례가 적합한 모델이 될 수 있겠다. 가우초 사내 두 명이 사소한 일로 칼을 빼들고 싸움을 벌인다. 죽거나 살아남는 일임에도 일상인양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외면한 이들 뿐이다. 작은 관심에서 푼돈을 걸고 싸움을 즐기는 이들조차 없다. 어느 누구도 칼부림을 말리려고 하지 않는다. 싸움하는 이들 또한 누가 죽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 누가 내가 될 수도 있는데도 전혀 괘념치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정적만이 흐를 뿐이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스틸컷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스틸컷

    그런데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들의 싸움을 주도하는 주체들이 있다. 바로 칼이다. 태곳적부터 두 개의 칼들은 철천지원수였다. 황야의 거친 사내들의 몸을 빌려 그들은 격렬한 싸움을 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다. 물질은 소진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정신을 가진 이들을 조정해 그들의 영혼을 빼앗아 기어이 숙주로 만들고 나서 '최초의 충돌'을 이어간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보면서 보르헤스와 가우초문학이 떠오른 이유이다. 스토리와 플롯은 좋았고, 화려한 캐스팅으로 내로라하는 남녀배우들이 총출동했다. 그들 역시 시나리오를 보면서 욕심이 났을 것 같다. 연기의 몰입도 또한 훌륭했다. 무엇보다 끔찍함을 끔찍하게 연출한 감독의 힘이 느껴졌다.

    영화의 도입부에 돈다발이 가득 든 루이비통 가방이 나온다. 좌충우돌하는 사이 '살육극'은 끝나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나 싶은데, 다시 예의 그 가방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제 주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돌고, 돌고, 돌고 도는 돈이 주인임을 이미 당연시하면서 우리는 그 돈의 고리가 돼 노예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익숙해 있지는 않은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역시 우문(愚問)에 우답(愚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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