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알베를 까뮈의 소설 ‘페스트’와 은유로서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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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알베를 까뮈의 소설 ‘페스트’와 은유로서 질병

    • 입력 2020.02.24 09:33
    • 수정 2020.02.24 10:05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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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정부가 23일 코로나19 감염사태에 대해 위기경보 최고대응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했다. 성경말씀처럼 이 또한 지나가겠으나 차후 우리가 감당해야할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위기임이 분명하다. 경제적 타격은 물론 정치, 사회전반에 걸쳐 신뢰가 무너질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작금의 사태를 접하면서 우리가 지혜를 얻어야할 고전을 찾아보았다. 프랑스 실존주의문학의 대가 알베르 까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페스트'가 아닐까싶다.

    소설 페스트의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항만도시 오랑, 의사 리유가 계단에서 죽은 쥐를 발견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뭔가 심상치 않은 점을 느낀 그는 시의 공무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긴급히 대처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사태는 이내 걷잡을 수 없을 상태에 빠진다. 도시는 폐쇄되고 외부와 차단된 채 시민들은 고립되고 만다. 그들에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은 모든 일상을 한순간 뒤엎어 버리고 사람들을 끔직한 고통에 빠지게 한다. 소설의 도입부는 중국 우한의 현재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그러나 소설은 절망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까뮈는 그의 펜에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데, 이로써 그들이 서로 연대하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도시,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자발적이던 혹은 비자발적이던 오랑에 남게 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사태를 헤쳐 나가야할 길을 모색한다. 저마다 판이한 태도로 재난을 대하는 이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어쩜 그리 겹칠까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 그리는 사람들의 군상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는 도시를 탈출할 생각으로 집중해 있고, 어떤 부류들은 그 혼란을 틈타 돈을 벌 생각으로 사태를 즐기기도 한다. 미스터리하게도 짐짓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며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도 있다. 반면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서서 당면한 페스트와 싸워야 할 당위에 충실한 이도 있다. 이 역시 우리가 현재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다양한 현상들과 싱크로율이 높아 보인다. 마스크와 손세정제를 사제기하는 등 매점매석을 통해 돈을 챙기려는 행태를 보이는 이들이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민낯인가 싶어 얼굴이 붉혀지기도 한다. 

    반면 취재차 오랑시에 왔다가 고립된 파리에서 온 신문기자 랑베르는 보이지 않는 공포 앞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등장인물이다.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고통 받는 자신이 도대체 왜 여기에 있어야하는가에 대한 회의와 후회의 감정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네 보통네 사람들이 가장 이입하기 좋은 캐릭터일 것 같다. 그러나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던 그는 의사 리유의 살신성인의 자세에 감화돼 그와 함께 하기로 한다. 

    같은 관점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다양한 이유로 우한에 남아있는 교민들과 유학생들과 함께하려고 중국체류를 선택한 의사분과 유학생학생회장 등에 대한 소식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는 까뮈의 이상적인 분신으로서 주인공 리유와 랑베르의 조합을 만나고 있는 있지는 않나싶다.

    한편 페스트(흑사병)을 타락한 인류에게 내려진 형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던 가톨릭사제 판느루 신부 역시,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다. 그 또한 마침내 의사 리유의 행동에 동의하게 되고 설교의 태도를 바꿔나가고 적극적으로 리유를 돕는다. 판느루 신부와 대척점에 있는 등장인물로는 처음부터 리유의 생각에 동조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그를 돕는 말단직 공무원 그랑이 있다. 병마의 확산방지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바 의무를 다하는 의료진 및 관계부처공무원들을 연상케 한다.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혐오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일부 종교지도자를 자칭하고 광화문 앞을 차지하고 이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판느루 신부의 회계를 정면에서 바라보아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작 회계해야할 당사자는 무고한 시민이 아니라 선민의식이라는 비뚤어진 신념으로 가득 찬 자신들임을 직시해야 할 터인데, 그리 쉬이 변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 소설과 다른 것 같다.

    사실, 까뮈의 소설은 잘 알려진 대로 전후문학 혹은 부조리문학으로 분류된다. 2차 세계대전의 이후 문학사적으로 이들 사조를 이끌었다는 평가가 더 맞는 듯싶다. 여하튼 전후문학의 차원에서 페스트는 전쟁에 대한 은유로 읽혀진다. 소설에서는 페스트의 창궐 시점이 1940년으로 2차 세계대전 발발시점과 맞물려있다. 소설 속 대사처럼 페스트는 저마다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부조리한 무엇이다. 따라서 방심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킨다. 다른 이들을 감염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온전한 의미로 전염병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마음 어딘가 있는 원초적 전쟁으로서 폭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이의 선동에 감염돼 타인을 미워하고 그 미움과 혐오를 폭발시키는 정점은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1913년, 1차 세계대전 직전에 태어나 무의미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까뮈에게 전쟁은 부조리이다. 까뮈는 부조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반항적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항적 인간이란 일종의 레지스탕스다. 수동적 태도와 싸우고 능동적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선 투쟁해야 한다. 모든 전쟁은 혐오에서 시작되고 혐오를 동반한다. 그리고 혐오를 낳는다. 어쩌면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서 이미 혐오라는 전쟁에 준하는 상황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내파를 부주키는 혐오를 통해 혼돈상황을 반기는 세력들이 있는 듯해 우려된다. 지금은 우리가 직면한 부조리가 무엇인지 의식을 또렷이 해야 할 때다. 소설의 문장처럼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 모두가 공유의 삶을 위해 '성실하게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또한 본의 아니게 타인을 감염시킴으로써 위해를 끼칠 수 있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는 것뿐 다른 길은 없다. 

    따라서 어떠한 형태로든 괴담수준의 가짜뉴스로 상호간의 신뢰를 깨고 혼란을 부주키는 행위는 이미 부조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질병과 전쟁이 은유로서 만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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