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정치자금법 비웃으며⋯2000만원 들여 2~3배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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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정치자금법 비웃으며⋯2000만원 들여 2~3배 남긴다

    [선거 시즌 한철 작가들] 하. 책으로 돈 버는 정치인들
    한날 한 장소서 1시간 차 연달아 개최
    기업 후원 금지 등 규제에 모금 창구로
    판매 계획, 상품성 없는 하루짜리 출간
    “정가 판매, 회계 공개로 투명화 해야”

    • 입력 2023.12.21 00:09
    • 수정 2024.03.06 14:14
    • 기자명 최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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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철만 되면 출판기념회 초청장과 홍보물이 쏟아져 나온다. 책의 저자 대부분 전문 작가가 아닌 정치인들이다. 그들이 쓴 책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자신의 업적을 치켜세우고 철학을 읊으며 독자들에게 동감을 호소한다. 그리고 책보다는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판기념회를 연다. 춘천도 마찬가지다. 내년 열릴 제22대 총선을 4개월여 앞둔 이달 현재, 춘천 갑·을 지역구 출마 예정자 10명 가운데 5명이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선거 때면 명 작가가 되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를 추적한다. <편집자 주>

    지난 16일 춘천의 한 호텔. 박영춘 전 SK수펙스추구협의회 부사장과 허인구 전 G1 방송 대표이사가 1~2시간 간격으로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두 사람은 모두 최근 정치에 입문한 신인들로 내년 열릴 제22대 총선에서 춘천 갑·을 지역구에 출마할 국민의힘 소속 예비후보들이다. 이날 먼저 열린 박 전 부사장의 행사가 끝나자 수많은 인파가 서둘러 다른 층에서 열린 허 전 대표이사의 출판기념회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통로엔 각종 친목회, 기업, 기관 등에서 보낸 화환이 줄지었다.

    현역 국회의원은 물론 정치 신인까지 제22대 총선 춘천 지역구에 출마하는 이들이 줄줄이 출판기념회를 열고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 ‘출판’이 아닌 ‘출마’ 기념회라는 비판을 감수하고도 행사를 강행한다. ‘깜깜이 모금’ 행사로 전락한 출판기념회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22대 총선 춘천지역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이 모금함에 봉투를 넣고 있다. (사진=최민준 기자)
    제22대 총선 춘천지역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이 모금함에 봉투를 넣고 있다. (사진=최민준 기자)

    지역 사회에선 이 같은 모금 행사에 우려를 표한다. 정치자금법 개정 이후 기업 후원이 금지되고 후원금 액수가 제한되며 선거용 ‘실탄’을 마련하기 위한 편법으로 출판기념회 또는 북콘서트가 유행처럼 번졌다는 것. 지역 정가의 한 관계자는 “순수하게 책을 보고 싶어 기념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정치인들이 여는 출판기념회라는 게 사실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이며 국회의원 눈치를 봐야 하는 유관 기업, 기관 관계자도 당연히 참석할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최근 한 달간 춘천에선 허영 의원, 전성 춘천을 지역위원장, 유정배 전 대한석탄공사 사장(이상 더불어민주당), 박 전 부사장, 허 전 대표(이상 국민의힘) 등 5명의 정치인이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책의 정가가 1만~2만원인데도 오만원권을 잔뜩 꺼내 봉투에 집어넣는 이들도 있었고 거스름돈은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없었다. 영수증은 물론 회계 내역도 공개하지 않는다.
     

    출판기념회를 여는 정치인들의 책은 모두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춘천에 대한 비전으로 이뤄진다. (그래픽=박지영 기자)
    출판기념회를 여는 정치인들의 책은 모두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춘천에 대한 비전으로 이뤄진다. (그래픽=박지영 기자)

    출판기념회는 정치자금법상 후원금 제한(1억5000만원) 규정과 기업 후원금지 규정을 우회하는 수단이 된다. 현행법상 이를 제재할 방법은 없다. 출판기념회는 경조사에 해당해 결혼식 축의금처럼 각종 규제에서 벗어난다. 통상 경조사 비용은 모금 한도나 모금액 명세의 공개 의무가 적용되지 않는다. 즉, 돈을 낸 사람과 받은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봉투 속 금액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책의 정가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을 내는 ‘깜깜이 모금’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선거마다 매번 출판기념회에 대해 ‘구시대의 악습’ ‘꼼수 모금 행사’ 등의 비판이 나오지만, 정치인들은 이를 감수하고 행사를 강행한다. 출판기념회 행사 개최에 드는 비용(출판비·장소 대여비·디자인 제작비·현수막 제작비·사회자 섭외비 등)은 약 2000만원 정도로 알려졌다. 정계에선 참석자들이 정가의 수 배 이상을 지불해 책을 사는 만큼 출판기념회 한 번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최소 4000만~5000만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인지도에 따라 억 단위까지 넘어간다는 게 정계의 중론이다.
     

    제22대 총선 춘천지역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이 방명록을 적고 있다. (사진=최민준 기자)
    제22대 총선 춘천지역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이 방명록을 적고 있다. (사진=최민준 기자)

    정치인들이 발간하는 책은 비슷한 형식으로 이뤄진다. 박 전 부사장이 스스로 ‘자전적 에세이’라고 표현한 ‘박영춘의 꿈과 도전! 경춘제민’은 본인이 춘천에서 나고 자란 이야기와 정부 부처, 기업 등에서 활동한 경험이 주제다. 이를 토대로 춘천에 어떤 경제 정책이 필요하고 현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본인의 생각과 공약을 홍보한다.

    허 전 대표의 ‘새벽을 열면 길이 보인다’ 역시 자신의 경험과 사진을 비롯해 출마하는 지역구인 춘천과 접경지역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 각종 현장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찍었던 사진도 빠지지 않는다.

    기념회 행사장에 가득 쌓여있던 책들은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하루 동안 몇 배의 가격을 받고 책을 팔지만, 대상이 선거구 주민들에 한정돼 있고 자기 홍보 내용으로 구성돼 상품성은 의문이다. 춘천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한 예비후보는 실제로 “전문적인 연구나 내용이 담긴 건 아니라 서점에서 판매할 계획은 없다”고 못 박기도 했다.

    본지 취재 결과, 최근 출판기념회를 연 춘천 입지자들이 발매한 도서 가운데 일부도 시중에선 판매하지 않는 ‘유령 도서’였다. 출판기념회 당일만 불티나게 팔릴 뿐 서점이나 온라인에선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지역 한 출판 관계자는 “서점에 내지 않는 것은 저자가 책 품질에 자신이 없거나 애초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제22대 총선 춘천지역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에서 봉투 여러장을 든 참석자 한 명이 방명록을 적고 있다. (사진=최민준 기자)
    제22대 총선 춘천지역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에서 봉투 여러장을 든 참석자 한 명이 방명록을 적고 있다. (사진=최민준 기자)

    정치인들의 홍보를 위해 출판기념회가 필요하다는 반론도 있다. 현역 의원의 경우 4년 의정활동 결과물을 책으로 쓸 수도 있고 정치 신인에겐 본인의 얼굴을 지역에 알리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정치계에 만연한 출판기념회 모금 행위를 두고 거센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후원회 제도가 있는데도 다른 판로로 선거 자금을 마련하는 사실상 불법 갈취의 장”이라며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는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으며, 공정한 선거 경쟁을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출판기념회를 금지해도 또 다른 꼼수 모금 방식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선관위는 선거일 90일 전부터 출판기념회 개최를 금지할 뿐 별다른 조치를 하진 못하는 실정이다. 공직선거법에서도 ‘선거구민에 무료 또는 싼값으로 저서를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책보다 비싼 값을 지급할 때에 대한 설명은 없다. 강원특별자치도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예비후보들의 출판기념회 일정을 사전에 파악해 현장에서 선거법 위반 예방 활동을 벌이고 있다”면서도 “책 판매 수익은 정치 자금에 해당하지 않아 제재가 어렵다”고 말했다.

    후원금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규제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수년째 지속되고 있지만 정작 국회는 먼 산만 쳐다보는 형국이다. 2014년 출판기념회 전면 금지 법안이 나왔으나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18년에도 1인당 한 권으로 판매를 제한하고 수입과 지출 내역의 회계보고 의무화를 골자로 한 법안이 상정됐으나 폐기됐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출판기념회를 여는 출마자들이 선관위에 영수증이나 회계 내역 등을 제출하도록 만들어 책값의 정가를 받도록 강제하는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민준 기자 chmj0317@mstoday.co.kr]

    [확인=한상혁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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