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쓰는 산문] ‘쐬주로’ ‘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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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쓰는 산문] ‘쐬주로’ ‘찐하게’

    • 입력 2020.09.11 08:56
    • 수정 2020.12.10 14:08
    • 기자명 이향아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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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아 시인·수필가
    이향아 시인·수필가

    흔히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 왔다. 우리는 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인격이 있듯이 각 사람의 입으로 발성되는 그 말에도 각기 다른 품격이 있다.   

    예전부터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중시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관(身)과 말씨(言)와 문필력(書), 그리고 판단력(判)을 이르는 말이다. 외관이야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에 이어 중요한 조건으로 말씨를 들었으니, 우리가 날마다 쓰고 있는 말의 비중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우리 속담에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말은 사람의 진실과 양심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표징임을 알게 한다. 

    유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말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하여 말이 인간의 지성과 인식의 크기를 반영해 준다고 역설하였다. 말에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생각이 들어 있고 철학과 주장이 들어 있어서, 그냥 어쩌다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라는 변명은 설득력을 얻을 수가 없다. 

    말이 근래에 이르러 현격하게 거세어지고 강렬해졌다. 이것은 인심이 거세어지고 무서워졌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우리말은 존칭과 비칭이 발달해 있으며, 격음화현상과 경음화현상이라는 것이 있어 어감의 섬세한 차이를 표현해 왔다. ‘감감하다’와 ‘캄캄하다’, ‘깜깜하다’의 의미와 정서가 다르고 ‘통통하다’와 ‘똥똥하다’가 다르며 ‘거뭇거뭇’과 ‘꺼뭇꺼뭇’도 그 느낌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거세어지고 강해지는 말들은 이와 같은 느낌의 차이보다는 발음은 현하고 느낌은 강하게 변하고 있다. 종래의 순한 발음은 쓰지 않고 거센 말들만 쓰고 있는데, 특히 젊은 층에서 주고받는 말들이 그렇다.  
    소주를 ‘쏘주’ 혹은 ‘쐬주’라 하고 ‘생음악’이 아니라 ‘쌩음악’이라 발음한다. ‘과대표’라고 하지 않고 ‘꽈대표’라 하고 ‘새것’을 ‘쌔것’, ‘진하게’를 ‘찐하게’, ‘골통’을 꼴통‘이라고 한다. 무슨 말이든 거세게 발음하는 걸 보면, 부드럽고 순한 것은 자극성이 없어서 말하는 재미도 없는가 싶다. 이 시대는 청각이건 시각이건 강하게 내놓아야 관심을 모을 수 있나 보다. 

    강한 것을 자꾸 더 강한 것을 부르며, 이러한 강화 현상은 하나의 독립된 어휘에만 그치지 않고 문장과 구절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전쟁이라는 말을 즐겨 쓰게 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이나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말은 앞 뒷말이 그런대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도 있다. 
    방송국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여름철마다 ‘모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 전쟁의 기세에 대하여 담담하게 발표하곤 하였다. 한낱 ‘모기와의 전쟁’이라니, 이는 참으로 이상한 표현이다. 그뿐이 아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은 ‘살(肉)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제 상황이 어려운 때마다 ‘물가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대두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전쟁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인가? 전쟁, 전쟁, 하면서 우리는 은연중에 평화로운 생활 가운데 전쟁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이라는 말과 비슷한 비율로 ‘지옥’이라는 말도 잘 끌어다 붙인다. ‘입시지옥’이니 ‘교통지옥’이니 하면서 전쟁 결과의 지옥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 같다. 수년 전 아시안 게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 측 응원단 이름이 붉은 악마였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과연 적절한 이름이었을까? 세계적인 게임에서 자국의 승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악마’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리 역설과 아이러니, 혹은 유머라는 말로 두둔하여도 부족하고 어색한 이름이 아닐까? 

    정서를 순화한다는 것은 언어를 순화한다는 말과 같다. 강화보다는 유화가 훨씬 부드럽고 넉넉하며 여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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