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정의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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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창수의 딴생각] 정의는, 있는가?
  •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9.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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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이제 정의를 얘기한들 누가 믿겠냐? 태준아, 내가 모두 안고 가면 된다. 넌 나처럼 포기하지 마라. 넌……나보다 강하잖니.” 지난해 여름, 매회 가슴을 졸이며 보았던 드라마 〈보좌관〉 시즌1에서 ‘조선시대 청백리’를 연상시키던 정의로운 국회의원 이성민이 전직 보좌관 장태준과 통화를 하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후보시절 유입된 5천만 원이 불법자금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검찰 출두를 앞둔 상황에서 그는 이 말을 남긴 채 지역구 사무실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통화를 하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장태준이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피투성이가 된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장태준은 빗속에서 오열을 하며 “알량한 법 뒤에 숨어 수백억씩 받아쳐먹은 놈들은 히히덕거리며 잘도 사는데 그깟 오천만 원 때문에……”라고 말끝을 흐린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정의당 노회찬 의원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드라마 속 이성민 의원의 죽음은 실제인 것처럼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소식을 전해들은 4선 의원 송희섭의 얼굴에 어린 미소와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별 수 없었군”이니 “오천만원이든 몇 십 억이든 결국은 같아. 어떤 놈은 건더기 먹고 어떤 놈은 국물을 먹는 거지. 우린 계속 건더기를 먹읍시다,”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며 박장대소하던 정치인들을 지켜볼 때는 진짜인 듯 치가 떨렸다. 그러나 ‘실제’와 ‘진짜’는 허구보다 덜 끔찍하고 덜 섬뜩하고 덜 심각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드라마의 도입부 화면에 걸린 “본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정당, 지명, 기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 없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자막을 “본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정당, 지명, 기업, 사건 등은 이름만 다를 뿐 실제를 그대로 옮겨놓았음을 알려드립니다,”로 바꾼다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쓰렸던 것은 이 물음들에 “아니다, 틀렸다,”라고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년쯤 전,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화제가 되었을 때, 밑줄을 그어가며 그 책을 읽고 있던 내게 친구 하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건 잘못된 거야.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는 건, 일단 정의란 게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 정의 자체가 없는데 그게 뭐냐고 물을 순 없지.” 그의 웃음은 냉소로 바뀌어 있었고, 그 마저도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논리는 매우 자명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정체나 개념을 묻는다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마치 다그치듯, 혹은 확인하듯, 어쩌면 “그래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니?”라고 한심해 하듯 다시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넌, 왜 정의가 없다고 생각해?” 한참이나 지난 뒤 내가 그 친구에게 물었던 말이다. 그러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명확하고 또렷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의가 있기는 해. 문제는 정의가 있는 거기에 우리가 없다는 거지. 정의는 사전에, 책에, 드라마에, 영화에, 소설에만 있을 뿐이야. 우리는 사전으로 정의를 확인하고, 네가 읽고 있는 그런 식의 책으로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로 정의를 꿈꿀 뿐이야. 그렇게 우리는 정의가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지. 정의는 없어. 냉철하게 생각해봐. 정의란 걸 본 적이 있는지. 어디서 봤었는지, 언제 봤었는지.”

줄어들어가던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던, ‘광복절 집회’와 관련된 기사를 볼 때마다 입에서 한숨이 비어져 나오던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사들의 파업 소식이 전해졌을 때, 5년 전 내 귓속을 아프게 파고들던 친구의 말이 들려왔다. 어쩌면, 친구의 말처럼,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랑도, 평화도, 희망도, 그저 사전 속에,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 속에만 존재할 뿐일지도 모른다. 있다고, 있을 거라고, 있어야 한다고, 헛되게 꿈꾸고, 착각하고, 그리워하고만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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