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쓰는 산문] 니가 무슨 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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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쓰는 산문] 니가 무슨 죄냐?
  •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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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시인·수필가
이향아 시인·수필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의지할 곳이 없어요.”
그녀는 정말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처럼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시할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라는 말을 존경과 사랑을 모아 발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시부모와 시할아버지를 함께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시부모는 3년 간격으로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고 반신불수로 누워있는 시할아버지의 뒷바라지를 손자며느리인 그녀가 혼자서 해야 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켜드리면서 어색하거니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언젠가 내가 할까 말까 오래 망설이던 말을 문득 털어 내놓자, “불편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하기로 한다면 한없이 어색하고 불편하지요,”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이 그녀는 편안하게 대답하였다.

“오죽하면 손자며느리 손에 당신의 육체를 맡기겠어요?” 처음에는 할아버지도 당신 몸을 맡기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난처하고 미안하신지 어쩔 줄을 모르셨어요. 걱정하지 마시라고 아무리 안심시켜도 기어코 당신 힘으로 처리하려다가 요강을 엎은 적이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그날 오후 내내 통곡을 하셨어요. ‘니가 무슨 죄냐? 나는 나지만 니가 무슨 죄냐?’ 할아버지의 흐느낌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존심과 수치심과 염치 때문에 우셨을 거예요.”

그녀는 이 말을 숨을 고르며, 여러 번 쉬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러던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하루 내내 누워서 지내야 했던 할아버지, 당신 힘으로는 당신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대소변까지 손자며느리에게 맡겨야 했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것이다. 

손자며느리인 그녀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밤에 문단속을 더 철저하게 해요. 도둑이 함부로 들어올까 봐 무서워요. 살아계실 때는 늘 든든했는데...”

나는 문득 지난겨울에 돌아가신 K 박사님을 생각했다. K 박사는 시내의 중심지에서 내과 병원을 운영하는 원장이었다. 그는 명의로서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품으로써도 존경을 받아왔기 때문에 병원문을 닫았다는 말을 듣고도 ‘이제는 쉴 때가 되었나 보다’ 했었다. ‘이쯤에서 일을 접은 것은 잘한 일이다. 평생을 그만큼 일을 많이 했으면 이제는 노후를 즐기기도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K 박사의 지혜롭고 여유로운 판단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신문에 K 박사의 부고가 크게 났었다. 더 놀라운 것은 병사도 아니고 돌연사도 아니고, 자살이라는 것이었다. 2년 전에 상처는 했지만, 아들 며느리가 이런저런 화제에 오를 만한 효자로서 항간에 이미 이름이 나 있었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안 사실이지만 K 박사는 그동안 변실금(便失禁)으로 남모르게 고생을 했었나 보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형편에 맞게 처리가 되어 크게 고민하지 않았지만, 혼자서 아들‧며느리와 살면서부터는 불편이 많아졌을 것이다. 

며느리는 날마다 새것처럼 깨끗한 속옷을 시아버지 앞에 대령하였고 아무 불편도 느끼지 않도록 잘 보살폈다. 그러던 중 K박사는 아파트의 공동쓰레기함에서 무더기로 버려진 자기의 속옷을 발견하였다. 그동안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속옷을 한 번도 빨아본 적 없이 즉각 즉각 쓰레기로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K 박사의 자살원인이라고 한다면 너무 가볍게 생각되는가? 

아니다, 그것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상실감이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언제 끝날는지 모르는 모멸감, 모를 때는 견뎠지만 알고는 간과하기 어려운 자기 혐오감 때문일 것이다.  

시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든든했는데, 돌아가시니까 도둑이 무섭다는 손자며느리, 나는 그 손자며느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할 때의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렇게 말하는 손자며느리의 맑은 눈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있고 그 하늘에는 흰 구름이 한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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