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수면사(睡眠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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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수면사(睡眠寺)

    • 입력 2020.05.26 06:50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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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면사(睡眠寺)

                                         전윤호

    초파일 아침
    절에 가자던 아내가 자고 있다.
    다른 식구들도 일 년에 한 번은 가야 한다고
    다그치던 아내가 자고 있다
    엄마 깨워야지?
    아이가 묻는다
    아니 그냥 자게 하자
    매일 출근하는 아내에게
    오늘 하루 늦잠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랴
    나는 베개와 이불을 다독거려
    아내의 잠을 고인다
    고른 숨결로 깊은 잠에 빠진
    적멸보궁
    초파일아침
    나는 안방에 법당을 세우고
    연등 같은 아이들과
    잠자는 설법을 듣는다

    *전윤호:1991년『현대문학』등단. *전,한국시인협회사무총장. *시집「천사들의 나라」외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참, 아름다운 시다. 인간애가 물씬 풍긴다. 아내를 위해 방안에 이토록 고고하고 고요한 절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가정은 얼마나 행복할까! 환한 이미지가 방안 가득 출렁거린다.

    손길 닿는 곳마다, 혀끝에서 구르는 말소리마다 게송(偈頌)이다. “엄마 깨워야지?” 아이가 묻는다. “그냥 자게 하자”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에서부터 참 정겹게 흘러간다. “아내에게 오늘 하루 늦잠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랴” 화자의 말은, 말 그대로 사랑의 사리(舍利)다.

    “베개와 이불을 다독여 아내의 잠을 고여 주는” 손길, 그 손길에서 묻어나는 사랑의 향기는 온 방안이 자비의 향기로 가득하다. “고른 숨결로 곤한 잠에 빠진” 아내의 잠을 “적멸보궁”이라니, 이만 한 비유라면 ‘적멸보궁’ 열 채도 지을 수 있는 사랑이다. 아름다운 심시(心施)는 절정으로 이어진다. 화자는 “안방에 법당을 세우고/ 연등 같은 아이들과/ 잠자는 설법을 듣는” 무아경에 이른다. 

    한 가정의 사랑이, 충만한 사랑의 배려가 이 정도에 이르면 선법(禪法)이 따로 있겠는가! 설법도 경전도 현실 저 뒤편에 근원하는 이론에 불과하리라. 우리들 가정마다 이런 절(寺) 한 채씩 지을 수 있는, 상대방을 위하여 지어 줄 수 있는 아량과 도량을 가진 남편과 아내로 가득 찬 사회가 이뤄진다면 우리 사회는 한층 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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