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역사기행, 유적탐방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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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역사기행, 유적탐방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 자유기고가
  • 승인 2020.05.21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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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한국은 산이 예쁘고 아기자기하다. 교통체증이 극심하고 고층건물이 즐비한 대도시에서도 한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고도 100~500m의 낮은 산이나 봉우리가 있다. 분주한 도시 한가운데 굽이굽이 솟아있는 산봉우리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쾌적해진다.

산 중턱과 산등성이 곳곳에서는 이 땅에 뿌리내린 수많은 이들의 기원이 담긴 돌탑들이 보인다. 다른 이들이 올려놓은 돌무더기가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각자가 조심스레 쌓아 올린 돌탑들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필자는 이 투박함 속에서 도심 공간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느끼곤 한다. 

필자는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그 사랑은 무슨 거창한 사회정치적 사명이나 소속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땅에 대한 애정이다. 필자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흙, 나무, 돌, 산, 바람에 대한 애정이다.

 

대전 도솔산 중턱에 쌓인 돌탑. (사진=자유기고가 김용엽)
대전 도솔산 중턱에 쌓인 돌탑. (사진=자유기고가 김용엽)

필자는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도심지 한가운데서도 도도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산봉우리들이 좋다. 산 중턱에서 바람을 타고 콧속을 파고드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좋다. 민초들의 소박한 기원과 상상력이 담긴 돌탑들이 좋다. 계절에 따라 스스로 색깔을 바꾸는 저 낮고 아기자기한 산들이 좋다. 이 한결같은 강산들은 한반도의 굴곡지고도 역동적인 역사를 관통해왔다.

우리는 ‘근대 국민 국가’와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나라'를 동일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물론 우리는 근대 국민 국가의 틀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 의의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 땅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테두리가 근대 국민 국가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서구와 일본 그리고 한국 사회 일각에서 나타나는 배타적인 인종주의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근·현대의 산물이며 이미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에서 그 실체가 부정돼온 개념이다. 그럼에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은 많은 한국인에게 여전히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사실 학계에서 종종 정의되는 것처럼 '민족'의 개념을 철저하게 근대의 산물로만 본다면(사실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도 근대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현대 한국인을 단일민족으로 바라보는 것이 완벽히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근대 국가가 성립된 이래로 우리나라는 분단과 냉전 체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지리·정치적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때문에 외부 인구와의 접촉과 소통을 통해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질 기회를 한동안 차단당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가정'이 주요한 화두이자 키워드로 떠오른 것도 그동안 우리가 타 문화권 사람들과의 교감과 소통 기회가 적었으며 여전히 서툴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우리가 공식적으로나 사적으로 통용하는 민족의 개념은 그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는 민족을 근·현대를 넘어 역사를 관통하는 실체로 바라본다. 이것이 맞느냐 틀리냐를 떠나서 이 관점에서 한반도의 역사를 바라보면 민족국가의 경계는 그 실체가 모호해진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갈 것도 없다. 한반도에 단일 국가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고려조 이후에도 한반도는 국내외적으로 인구 유동성이 큰 지역이었다. 중세(고려 시대)와 근세(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한반도는 다소 고립된 위치에 있었던 섬나라 일본과의 인구 유동과 문화 교류가 잦았던 지역이다. 시종일관 중원의 왕조, 이웃나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했던 베트남과 대조된다.

고려왕조가 475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까지 합해 518년을 지속해 비교적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반면 한반도와 근접한 중국은 왕조들이 길어야 200~300년 동안 지속됐으며 이민족 간 각축장이 된 탓에 통일 왕조가 유지된 기간이 비교적 짧다. 이런 이유로 중원의 왕조 교체기 때마다 한반도는 전 왕조 유민의 주된 피난지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특히나 1644년에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 청나라에 망한 뒤 명나라 유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유입됐다. 명에 대한 사대 의식과 청에 대한 저항 의식이 남아있던 조선조정은 이들을 일반 귀화인과는 구별되는 향화인으로 분류했다. 또 그보다 훨씬 전대인 세종조에는 4군 6진 정책을 통해 여진족들이 대거 조선으로 흡수됐다. 현재 국사 교육 커리큘럼에서는 세종의 4군 6진 정책을 군사적인 영토 확장 정책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실상 세종의 4군 6진 정책은 조선과 근접한 여진족들에 대한 유화책이자 공존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사실 세종의 할아버지이자 조선왕조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 가문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시절부터 여진족들과 깊은 인연이 있었으니 당대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 국내 성씨 중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는 고려 시대 베트남 리 왕조 후손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정선 이씨의 경우는 논란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 문중은 한국-베트남 간 문화 교류에서 가교 역할을 하며, 베트남 정부로부터 법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물론 상당수는 역사성이 떨어지지만 국내에 존재하는 성씨 중 상당수가 중국, 몽골, 만주, 베트남, 일본, 심지어 서역 출신 인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와 졸고를 읽고 있는 여러분의 조상 중에도 얼마든지 외지인이 있을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은 중·근세기에 외부 인구와의 접촉이 훨씬 적었던 일본이 근대기 이후 자신들의 제국주의·군국주의 정책을 뒷받침했던 민족 이데올로기가 그 시초이며 후대의 군사정권에서 이전보다 확장한 개념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냉전 체제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보다 넓은 시야로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비로소 외세에 대해 저항과 공존을 오가며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역동적으로 발전시켜나갔던 조상들의 지혜와 용기를 다시금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터키-바티칸-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귀국한 후 고국을 바라보면서 필자가 느꼈던 단상이다. 필자가 네 차례에 이르는 4개국 역사 기행을 쓴 것도 이 감회를 독자 여러분께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종교인 정교회와 이슬람 문화를 체험하면서 강대국 중심의 좁은 국제정치관과 역사관, 배타적 국수주의로부터 어느 정도 탈피할 수 있게 돼 기쁘다.

여행하면서 만난 현지인들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졸고를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과 데스크에도 감사를 표한다. 앞으로 더 생생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은 여행 이야기와 세상 이야기로 계속 여러분을 찾아뵙겠다.

/자유기고가 김용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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