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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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꽃잎

    • 입력 2020.05.18 10:09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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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은 개봉 당시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작품이다. 맨 처음 광주를 정면에서 다룬 상업영화라는 점이 그렇고 다음으로 오디션을 통해 주연으로 발탁된 어린 여배우의 연기가 그러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시절 단행된 전두환, 노태우 등 12·12 군사 반란의 주범들에 대한 역사 심판이 이루어지던 시점에서 기획된 작품이지만, 오랫동안 '광주의 비극' 자체에 대해 쉬쉬하던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영화가 개봉된 사실만으로도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영화가 만들어진 1996년은 시인 곽재구가 그 시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를 '사평역'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빌어 '자조적인 언어'로 묘사하던 때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흐른 때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실이나 다락방에서 몰래 광주 참상의 기록영상을 보던 마음으로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극장 안, 자리를 잡고 앉은 관객들은 광주의 참상이 기록영상처럼 재연되는 극의 후반부 서사의 정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이유인 즉슨 난생 처음 보는 앳된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와 미친 채 거리를 헤매고 끝내 유린당하는 과정을 목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영화 '꽃잎' 스틸컷 
    영화 '꽃잎' 스틸컷 

    극 중 나이 열일곱 '소녀'와 실제 나이 열일곱의 배우는 그렇게 위태로워 보였다. 어린 여고생이 그런 역할을 정상적으로 소화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끔찍했다. 사실 지금 그와 같은 배역을 미성년자에게 맡긴다면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 같다. 그만큼 극 중 주인공 소녀는 광기와 폭력에 노출돼 있었다. 

    다행이라면 그 어린 배우는 타고난 에너지를 스크린이 아닌 무대 위에서 폭발시켰고 성년이 돼 배우보다는 가수로서 대중들로부터 더 큰 인기를 얻었다. 꽃잎을 봤던 많은 이들이 부모의 마음으로 아이가 영화를 찍으며 상처를 받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에 그녀의 성공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장선우 감독은 도대체 왜 우리를 그렇게 불편하게 했을까? 그가 관객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무엇을 끄집어내려 했던 것일까? 감독이 '꽃잎'의 연출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관객성'에 있다. 관객에게 끊임없이 가학과 피학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피폐된 상태에 도달하게 한다. 이를 통해 익명에 숨어 침묵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스스로 바라보게 하는데 영화 연출의 미학적 성취를 집중하고 있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름이 없다. 소녀는 '소녀'이고, 소녀의 엄마는 '엄마', 오빠는 '오빠', 그리고 가족이 모두 죽어 고아가 된 소녀를 찾아 마찬가지로 길을 헤매던 오빠의 친구들 역시 그저 '우리들'로 칭해졌을 뿐이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소녀가 반쯤 미친 상태로 거리를 헤매다가 비슷한 용모 때문에 친오빠로 착각하고 따라다닌 부랑자 '장'만이 이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장' 쯤으로 이해돼 진다. 

    이들 익명의 존재들과 동일시된 관객들 역시 익명성에 숨어 소녀가 겪는 온갖 고충과 폭력 그리고 광기를 목도할 뿐, 극장의 아이러니에 빠져 그녀를 구하지도 극 중의 '우리들'에게 인도하지도 못한 채 객석을 맴돌게 된다.  

     

    영화 '꽃잎' 스틸컷 
    영화 '꽃잎' 스틸컷 

    영화에서는 유독 거울 신이 많이 등장하는데, 감독은 이를 통해 관객에게 극 중 인물과 동일시되는 경험과 제3의 존재로서 관찰자의 경험을 동시에 수행하게 한다. 예를 들어 극 중 장이 소녀를 유린한 후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장면에서 장의 얼굴이 비친 거울 속 안쪽 깊숙이 소녀의 얼굴이 정면으로 비추는 미러 샷이 있다. 이때 관객은 거울 속에 비친 두 배우의 눈과 마주치게 된다. '1차 나르시시즘'과 '응시'가 동시에 일어나는 모순된 지점이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극 중 두 인물은 거울 앞쪽에 배치돼 있고 거울을 통해 시선을 교환한다. 서로의 시점 쇼트가 교차되는 아이러니한 지점인데 가학의 주체인 장과 피학의 대상인 소녀의 일인칭 시점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나아가 화면 왼쪽 거울 앞에 장의 등을 살짝 카메라에 잡히게 함으로써 그의 등 뒤에 서있는 소녀 이외에 또 다른 주체가 서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이는 일종의 고스트의 입장에서 소녀를 바라봄으로써 유린당한 그녀를 전혀 돕지 못하는 관객을 목격자에서 방관자로 위치시키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영화적 장치다.

     

    영화 '꽃잎' 스틸컷
    영화 '꽃잎' 스틸컷

    가학과 피학의 현장에서 어느 쪽에 서더라도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장의 시선과 동일시 돼 가학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제3의 관찰자로 밀려나 거울에 비친 정면을 응시한 채 웃고 있는 소녀의 눈빛에 어떤 응답도 하지 못하고 도울 수없는 무기력함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의 미소는 비웃음으로 더욱 우리를 옥죈다.

    영화가 고발하는 지점은 바로 광주의 비극이 일어났던 당대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직시하게 하는 데 있다. 물론 그 시절에도 진상을 알리려고 죽음을 불사했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침묵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 명명백백해 보임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이를 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당시 우리들이 침묵했던 것에 대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5월 18일이다. 광주의 영령들은 아직도 영면에 들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아 안타깝다. 적어도 오늘, 우리는 누구를 욕하기 전에 우리들이 침묵했음에 대해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미안함에서 우러난 묵념을 먼저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으면 이제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명료하게 밝힐 것을 국가에게 우리들 자신 바로 시민의 이름으로 물어야 할 때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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