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터미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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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터미널①

    • 입력 2020.03.25 09:18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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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미널.1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서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1990년『현대시세계』등단 *시집「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외.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터미널! 우리들의 많은 애환이 배어 있는 곳, 내 어머니와 할머니가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에게 먹거리를 손에 들려주며 속울음을 삼키던 곳, 버스 정류장이란 정겹던 옛 이름은 어느 새 외래어에 밀려 터미널로 바뀐 곳, 그래도 그 곳에는 만남과 헤어짐의 젖은 가슴들이 촉촉이 배어 아련아련 옛날을 기억해 내고 있다.

    하루에 한 번밖에 다니지 않는 강원도의 어느 산간벽지로 가는 버스, 그 버스 앞머리에 어린 아들을 세워놓고는 아버지는 소변을 보러 가셨거나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새 그 어린 아들은 그 옛날의 아버지 나이쯤 되어 늙은 아버지를 데리고 강원도 산골이 아닌, 아득히 멀기만 한 서울 병원으로 검진을 받으러 간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 놓고 화자는 어딘가로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온다.

    남들은 다 버스에 올랐을 텐데 아버지는 아들이 시킨 대로 버스 앞 그 자리에 웅크리고 서 있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겹쳐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한없이 저물어 가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아이처럼 아들의 말만 따르는 그 아버지의 모습은, 그 터미널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린 아이일 것이다. 모든 아버지들은 다 이렇게 저물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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