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카츄사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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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카츄사 오빠

    • 입력 2020.02.18 00:00
    • 수정 2020.02.18 11:20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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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츄사 오빠

    이 서 빈

     

    어디 살까?

    주말마다 미제 초컬릿을 주고 사랑방 사탕을, 여학생 잡지를, 일기장을 사주고, 미제 휘파람으로 나의 사춘기를 공갈빵처럼 부풀려놓은 하얗게 잘 생긴,토요일 오후면 통기타 치며 팝송을 불러주던.

    주말 하늘은 구름 한 알갱이 없이 푸르고, 빛들은 물비늘처럼 뛰어다니고 바람은 솜털 날리며 춤췄네. 늦잠이 사라지고,안 하던 청소를 하고, 돌돌 말린 하루살이양말을 치우고 뒤집어 벗어놓은 으뜸 부끄럼가리개를 치웠네. 내가 게으름 피우면 카츄사 오빠 온다는 말로 부지런으로 길들였네.오빠가 사온 분홍벙어리장갑은 한여름에도 덥지 않았네. 벙어리가 아니었네. 방긋방긋 분홍스럽게,내 손이 물들었네. 이 다음에 너 다 크면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빨간 말 들으면서 덜 큰 내가 싫었네.비행기처럼 빨리 날아가서 크고 싶었네.

    친오빠는 불친절했고,카츄샤 오빠는 친절했네. 주말은 왔고, 카츄사는 안 왔고, 아침은 자라서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고, 밤중이 되고, 통금 사이렌이 지랄스럽게 울리고, 별빛이 글썽이고, 달빛은 뒤안뜰 대나무숲에서 흐느끼고, 목마와 숙녀가 울고 대신 밤을 잊은 그대가 밤마다 찾아왔네.

    별빛도 자라고, 달빛도 자라고, 목마와 숙녀도 자라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카츄사는 오지않았네. 벙어리장갑 끈은 너무 짧았고, 이별의 끈은 너무 길었네.

    *이서빈 :2014.동아일보신춘문예당선.시집달의 이동경로.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사랑에 눈뜨기 시작한 사춘기 소녀의 고백 같은 시, 참으로 아픔답다. 우리는 누구나 한 때 이런 열병을 앓으면서 사춘기를 보냈으리라. 현재도 많은 청소년들은 밤잠을 설치며 고뇌하는 팡세가 되기도 하리라. 사춘기 시절, 사랑과 기다림의 감정을 이토록 코믹하면서도 절절하게 그려낸 시가 얼마나 있을까? 여름에도 카츄사 오빠가 사 준 벙어리장갑을 끼고 더운 줄도 모르고 그를 기다린다. 일요일이면 아침이 자라서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고 긴 싸이렌이 울어도 오빠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새 별빛도 자라고 달빛도 자라고‘목마와 숙녀’로 자라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카츄사 오빠는 오지 않았다. 벙어리장갑 끈은 너무 짧았고, 이별의 끈은 너무 길었다는 절정은 긴 여운으로 출렁이게 한다. 우리는 일평생 이렇게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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