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남산의 부장들’, 픽션이 역사를 다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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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남산의 부장들’, 픽션이 역사를 다루는 방법

    • 입력 2020.02.17 10:42
    • 수정 2020.02.17 14:57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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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우민호 감독의 신작, '남산의 부장들'의 영화적 플롯은 건조했다. 그럼에도 극적인 장치 없이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실존인물들의 불안한 정서를 오롯이 담아냈다. 이러한 점은 정교한 심리극인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닮아있는데, 권력의 정점 언저리에서 등장인물들의 자의식은 과잉돼 있고, 또한 그만큼 그들은 모두 불안했다. 그런 그들 앞엔 이제 죽고 사는 문제만이 선택지로 남겨진다. 이로써 한편의 세밀화로 그린 심리적 '상황극'이 전개되게 된다. 

    60~70년대 대한민국 현대사를 좌지우지했던, 극 중 주요 인물들은 영화의 막이 내리기 전 모두 목숨을 잃게 된다. 그들은 비극적이게도 총을 맞아 죽거나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죽음은 평범치 않았던 삶과 닮아있다. 그러나 혁명가다운 극적인 결말이라기엔 무언가 비루해 보인다.

    감독은 서로가 믿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재연하고 나선, 그 속에서 주인공들이 가졌음직한 내면의 갈등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천착한다. 그리고 장기간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노회한 제왕과 그가 선택했던 이인자들 간의 밀고 당기는 게임은 영화 '게임의 규칙'에서처럼 '규칙이 없는 규칙'이었다는 사실로 마무리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그러나 사실 독재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관성에서 찾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오랜 기간 자신만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체득한 교집합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자연스레 일관되게 먹힌(?) 방식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되고 그 통치 방법을 다시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독재체제의 권력은 승리한 기억에 취해 쇠락하게 되고 마침내 소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체제의 기억 역시 개인의 기억처럼 영속적이지 않은 이유인데, 모든 기억엔 생로병사와 그리고 생이 반드시 반복된다. 이는 개인의 것과 체제의 것의 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순환적 역사관에 따르면 개인이 어떤 주체적 위치를 점유하느냐에 따라 역사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이클을 이룬다는 것은 주기의 반복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강산이 변하는 십 년을 주기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세대와 세대 간의 연차를 기준으로 보는 삼십 년을 주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세기가 바뀌는 백년을 주기로 볼 것인가? 그 외에도 여타의 다른 기준들 또한 가능해 보인다.

    주지해야 할 것은 어떤 주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반복되는가이다. 시작점이 어디가 되느냐 하는 기준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희망찬 혁명(?)이 촉발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반동의 시기를 견뎌야 하는 팍팍하고 신산한 현실로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감독은 영리하게도 위와 같은 사실 또한 다큐멘터리적인 역사적 사실의 배치로 갈음한다. 18년간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박정희는 그의 말년인 1979년,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부마항쟁을 계엄군을 동원해 무력진압을 결심한다. 막대한 희생자가 속출할 상황이 예상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이라면 국민들이 어쩌겠냐고 자신감을 갖는다. 성공한 기억의 추억은 일종의 권력을 유지하는 장치로 동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한다.

    그러나 혁명을 추억하기 위한 그들만의 만찬은 거기까지였다. 독재자는 자신의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거사를 벌인 중앙정보국장은 엉뚱한 결정으로 자신의 말로를 앞당긴다. 그리고 어부지리로 정작 권력을 잡은 이는 이후 12·12사태의 주연이 된다. 극의 말미에 주인 잃은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서 제 몫을 챙기는 전두환의 등장은 비극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로써 이후 일정 기간 공식적인 역사로서 기억의 주체는 유신체제의 잔당에게 넘어가게 된다. 

    기억은 권력이다. 극 중 유신체제의 주역들은 말끝마다 혁명을 입에 올림으로써 기억을 가다듬는다. 그러나 정작 서로가 5·16혁명에 가담한 이유로 상대를 따라했다고 증언한다. 따라서 유신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2차 혁명 역시 누가 먼저 주창했다고 자랑할 수 없을 정도로 누더기가 돼버린 상황을 맞는다. 이는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동기간에게 보이는 회피의 행동패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장치다. 그들은 서로 닮아있으면서도 더욱 서로를 닮아간다. 때문에 그들의 의심은 증폭된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그들 간의 유비와 의심은 망상을 넘어 공작이 되고, 사건의 비사건화라는 과정을 거쳐 역사의 이면이 돼버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여기에서 감독은 신화 대신 당대의 주역을 자처한 이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역사의 이면을 들춰내는 선택을 한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사적이었는가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로써 실존했던 모든 등장인물들의 기존에 구축된 신화적 캐릭터들은 해체된다.

    극 중 김재규는 우국지사의 풍모와는 멀어 보인다. 무자비한 면모와 배신자라는 이중적 이미지로 각인된 냉혈한 김형욱 역시 영화에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비루한 캐릭터다. 또한 그간 신격화된 박정희의 카리스마란 이인자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줄 듯 액션을 취하다가 토사구팽 시키는 비열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극 중에서 가명을 사용한 이유 또한 같은 연장 선상에서 이해돼야 한다. 역사적 사건임에도 역사로서 유신체제를 의미하는 박정희를 뺀 등장인물들에게 실존했던 인물들의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적 설정이 가미되었음을 드러내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신화화된 기존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는 장치가 된다.

    그러한 역설적인 방식으로 객관성을 확보하고 픽션(fiction)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형식 속에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짐짓 드러낸다. 그간 우리가 두려워했고, 신화화하며, 신격화되었던 역사적 사실이란 것이 얼마나 허접한 것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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