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해치지 않아’, 소망성취와 현실고발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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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시네마] ‘해치지 않아’, 소망성취와 현실고발의 사이

    • 입력 2020.02.03 08:55
    • 기자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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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여기 운영난으로 헐값에 매각된 동물원이 있다. 설상가상, 빚잔치로 돈 될 만한 고가의 동물들은 이미 다 팔려나갔다. 텅 빈 우리만 남은 동물원을 되살리는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로펌 변호사 강태수는 상상 이상의 깜직한(?) 일을 벌인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개월, 그 안에 새로 동물들을 절차에 맞게 구매하여 동물원을 개장하고 정상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한 상황! 신임 동물원장으로 위촉된 그는 사자, 고릴라, 북극곰, 기린, 나무늘보 같은 인기 있는 동물들을 새로 매입하는 대신 영화 소품으로 쓰는 ‘동물탈’을 구매한다. 그리고 남아있던 동물원 직원들에게 그 탈을 쓰게 하고 방사 우리 안에서 동물 역할을 하게 한다. 그런데 황당하기까지 한 상상력은 매우 ‘전술적’이기까지 하다.

     

    영화 '해치지않아' 스틸컷
    영화 '해치지않아' 스틸컷

    한마디로 역발상이다. 어찌 동물원에서 가짜 동물이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겠냐는 아이디어다. 관람객을 상대로 한 이 무모한 사기극은 코미디 장르답게 판이 커진다. 북극곰 역할을 하다가 탈수증상으로 목이 마른 주인공은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관람객들이 던지고 간 콜라를 마신다. 이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포착한 어떤 관람객에 의해 사진은 SNS를 타고 널리 퍼진다. 인생은 아이러니라고 했던가, 파산 직전까지 간 동물원은 이 일로 일약 명소가 되고 구경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다.

    여기까지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성을 가지고 간절히 바라는 바에 대한 염원에서 출발한 상상력은 현실이 된다. 현실과 괴리된 상상의 공간이 구축한 판타지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보게 함으로써 삶을 추동시키는 동력이다. 한편 지난해 방영된 TV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취한다. 사장도 도망친 기울어가는 업체를 살리기 위해 일개 노동자인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부류의 드라마가 사람들 심리를 움직이는 원리는, 현실반영 이외에도 현실을 견인하는 소망성취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화 '해치지않아' 스틸컷
    영화 '해치지않아' 스틸컷

    극 중에서 폐업과 동시에 구직과 이직으로 생활고를 겪어야 했던, 동물원 직원들은 다시 활력을 띤 동물원으로 몰려와 신임 동물원장을 연호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개인의 입신양명이 다수의 경제적 삶을 보장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체제에서 더한 선은 없다. 매우 윤리적인 상황이 실현되었지만 주인공은 딜레마에 빠진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면 그는 로펌변호사라는 자리를 잃게 된다. 반면 자신의 미래가 확실히 보장된 로펌과의 이해관계를 선택하게 되면 다수의 노동자들은 또다시 나락에 빠질 수 있다.

    일반적인 문법을 따르자면, 주인공은 전자를 선택하고 자신을 희생한다. 그렇게 봉합함으로써 일상을 되돌리고, 희망을 기대하게 하며 삶에 안주하게 한다. 그런데 영화는 전혀 다른 새로운 딜(Deal)을 시도한다. 임기응변과 우연과 우연 속의 기지와 좌절 그리고 예기치 않은 ‘희망의 여신’의 강림! 이로써 영화 속 거대자본은 명분을 확보하게 되고 부동산개발 사업은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동물원 가족들도 고용승계로 다시 직장을 구하게 된다.

     

    영화 '해치지않아' 스틸컷
    영화 '해치지않아' 스틸컷

    마술적 리얼리즘일지라도 영화 속 프리젠테이션의 이미지처럼만 된다면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와 비슷한 ‘시뮬라시옹’으로서 ‘생태공화국의 허상’을 현실 세계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다는 것이다. 바로 4대강 사업을 비롯한 각종 개발사업의 홍보 동영상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은유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는 그 간 토건 주의자들이 주도한 국토개발모델을 통해 부를 축적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종의 다양성은 고사하고 특정한 종의 존폐가 이제 간척에 다 한 것 같다. 그나마도 인간에 의해 근근이 보존될 뿐이다. 사실 생태주의의 생태(eco)는 그 사전적인 의미가 변질되고 인공의 무엇을 의미하여진 지 오래다.

    영화에서처럼 동물원에 갇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동물들을 구조해 돌볼 곳은 자연이 아닌 이제 생태공원뿐이다. 우울한 결론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본래의 것들을 원래의 곳으로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왔는지 모른다. 바로 영화 ‘해치지 않아’가 리얼리티로 다가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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